문학과 사회 - 한설야의 드러냄과 감춤 - 『피』를 중심으로 살펴본 우회적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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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학과 사회 - 한설야의 드러냄과 감춤 - 『피』를 중심으로 살펴본 우회적 글쓰기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설야의 드러냄과 감춤
- 『피』를 중심으로 살펴본 우회적 글쓰기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한설야의 활동과 신념
1) 문학 활동
2) 개작 활동
2. 『피』 연구
1) 내선결혼
2) 우회적 장치
3) 갈등 양상 분석
Ⅲ. 결론
Ⅳ. 참고 자료
I. 서론
작가는 누구인가? 왜 이런 질문에 답을 하고 시작해야할까? 그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이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별을 보고 길을 걷는 나그네가 암흑 속에서 방향도, 목적지도 가늠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야한다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나그네로서의 작가는 오로지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그 벽을 뛰어넘어야하며 그것이 옳은가 아닌가는 늘 불확실하기만 한 것이다. 어쩌면 그런 불안 위에서 줄타기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치열한 투쟁적 작품을 쓰거나 당분간 절필할 것인가, 권력자에게 접근하여 동조하고 아부할 것인가, 위장과 암시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계속 활동할 것인가. 단지 세 가지 유형으로선택의 문제를 나눌 수는 없기에 우리는 여기에 신념의 문제를 더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리고 『피』를 분석함으로써 한설야의 글쓰기 방식의 유형을 파악한 후에 그가 드러낸 것과, 감춘 것에 대한 조원의 의견을 전개시키고 이로써 우리가 보는 한설야의 우회적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세 가지 유형 중에 하나로 한설야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현실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 시대의 증언자와도 같은 인물을 위치시키면서 위장과 암시의 방법으로라도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의지를 내보이는 그의 작가적 신념일 것이다. 작가가 외적 여건의 방해에 대해 양심을 걸고 최선을 다해 대처하였는가의 여부가 그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설야가 식민지시대에 글 쓴다는 소명을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하였는가, 그의 글쓰기 방법에 주목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Ⅳ. 참고 자료
* 한설야의 생애
한설야는 1900년 8월 30일 함흥 교외의 나촌이라는 마을에서 구한말 군수를 지냈으며 상당한 재산가이자 지주였던 부친과 농촌 여자인 모친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함흥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하고 당시 서울에 있던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4학년 2학기 시작 전에 서모와 싸우고 서울을 떠나 함흥고보에 편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고 3.1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일시 투옥, 석방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함흥법전에 진학했으나 종교사건에 연루되어 제적을 당한다. 이로 보면, 한설야는 어릴 때부터 자유 분방하고 활달한 성격을 타고난 것으로 짐작된다.
1920년 형을 따라 중국 북경으로 가서 그곳에서 형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중국 육군성 관리인 어떤 조선인 집에서 서생으로 있으면서 일본논문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다. 이 해에 북경 학교에 다니면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1921년 잠시 서울로 왔다가 다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여기서는 문학보다 사회과학에 더 열중하였고 또 학교보다는 숙수에 틀어박혀서 혼자서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간에 그가 사회주의 노선의 문학을 택하게 되는 사상적 바탕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학교를 휴학하고 처녀 장편을 썼다가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그 해 겨울 귀국하여 북청고보 학습강습소 강사로 재직하면서 문학 작품의 습작을 시작하였고, 1924년 25세 때 일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1925년 처녀작 ‘그날밤’을 이광수의 추천으로 4호에 발표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문단에 등단하는 문학적 삶이 시작된다.
이 해에 부친이 사망하자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서 가족 모두 만주 푸순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 시절 프로예술에 경도된 수편의 일본문 단편을 만주일일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다. 프로문학에 뜻을 두게 되면서 쓴 작품(그릇된 동경)들의 공간적 배경은 각각 해삼위와 북만주의 한지로 되어 있다.
1927년 28세 때 2월에 서울로 돌아와 KAPF에 가입하여 기관지 속간에 힘쓰리도 했으나 결국 되지 않고 독서 생활로 지내게 되는데, 이 때 ‘계급 대립과 계급 문학’이란 글 등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이론가로 등장한다.
1928년에는 생활이 어려워 다시 고향 함흥에 돌아와 먹고 살기 위해 조선일보 지국을 1년간 경영하였고, 1929년에는 농촌의 황폐화와 농민의 노동자화를 그린 단편 ‘과도기’와 ‘씨름’등을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계급문학 운동의 전개 과정 가운데서 초기 신 경향파 소설이 거둔 바 있는 문학적 성과와 그 한계를 넘어서는 단계에 자리잡고 있는 단편소설들로서 주목되고 있다.
1931년 서울로 와서 를 속간, 단독으로 2호까지 내었고, 1932년 조선 지광사에 입사하여 편집을 맡고 1933년에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편집일을 하는 등 다양한 문필생활은 계속한다. 이 30년대 초기에도 계속하여 ,,,등 많은 소설들을 창작 발표하였고, 이 무렵에는 ,,, 등 4편의 희곡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평론은 대부분 문예시평과 리얼리즘의 기법에 관한 논의를 계속 전개해 나갔다.
1934년(35세)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있던 중 5월에 KAPF 제2차 검거 사건으로 1년여 전주 감옥에서 옥중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수감 기간 중 한설야는 자신의 소설 세계의 한 전환의 고비를 맞는다. 1935년 연말에 석방된 한설야는 1936년 에 첫 장편 을 연재 발표한다.
1937년에는 장편 를 에 연재 발표하였고, 1938년에는 인쇄소를 그만두고 동명극장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기간 30년대 후반에도 본격소설을 쓰려는 노력에 계속되어 꾸준히 ,,,,등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진보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리얼리즘을 획득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계속하여 많은 평론도 발표하고 있다.
1936년에는 장편 을 에, 1940년에는 장편 을 에 발표함으로써 이 시기까지 도합 4편의 장편소설을 남기고 있다. 이리하여, 1925년 처녀작 이후 1943까지 정리되어있는 자료에 의하면 한설야가 그때까지 남기고 있는 문학 작품은 단편소설 46편, 장편소설 4편, 평론류 64편, 희곡 4편으로 되어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 직후인 9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을 조직 결성하여 주도하다가 조선 문학가 동맹에 참여, 월북하기에 이른다. 이로보면, 1935년 5월 KAPF 해체 이후 한설야가 걸어온 문학적 역정은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의한 어쩔수 없는 이념적 전향의 양상을 보여준 것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강요된 현실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문학 행위였음이 드러난다.
한설야는 월북 이후 1946년 3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결성 주도하였고, 1948년에는 제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51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과 북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 합동이 되어 조선문학가총동맹이 창설될 때 위원장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맡은 것으로 되어있다.
1963년(64세)에 전 직책을 박탈당하고 숙청되기까지 조선 해방전쟁을 다룬 , 적색농조를 다룬 을 발표하고,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작품로 인민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자세히는 알 길이 없고 분단 문학의 불행한 역사 속에 파묻혀 있을 뿐이다.
* 참고 문헌
장성수, 『한설야 소설 연구』, 1999
이상갑, 『한설야 창작 방법론 연구』
이경재, 『한설야 소설의 개작 양상 연구』
조진기, 『내선일체의 실천과 내선 결혼 소설』
김효정, 『1930년대 후반 한설야의 작가의식 변모 양상 연구』
지난 학기 자료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