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龍兒박용철의 생애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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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龍兒박용철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용아(龍兒) 박용철(1904-1938)
1. 생애와 활동
박용철은 1904년 전남 광주시 광산구 소촌리에서 박하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두 형이 죽는 바람에 4남매 중 장자가 된 용아는 4살 때 한자를 익혔고, 7살 때는 사촌누이가 한글을 가르쳐 주자 제자리에서 깨치고는 곧 신소설들을 읽어낸 수재였다. 『박용철 전집』말미에 붙인 박용철 아버님의 말.
총명하였고 학교에서도 정상급의 성적을 얻는 등 수재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특히 수리에 소질을 보였다. 그는 1911년 광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배재의숙으로 전학하여 다녔다. 1921년 동경의 청산학원 중등부 4년에 편입한 그는 여기서 영랑 김윤식을 만나 친교를 맺고 시를 쓸 것을 권유 받았다. 본래 박용철은 수학 특히 기하에 흥미와 재능을 가진 이공계 지망 학도였다. 그가 문학을 하게 된 동기는 그의 친구인 영랑 때문인 것 같다. 그가 학교에서 수재로 수리에서 천재적이라고 학교 교사의 칭찬이 대단할 때 그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들인 이가 바로 영랑이었다. 는 말을 그 자신이 입버릇처럼 하였다는데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최원규(2007),『우리시대 시문학의 공간적 위상』,오늘의 문학사.
문과로 전공이 바뀌고 난 다음 그는 비상한 열정과 각오로 시문학을 파고든다.
그러나 그해 여름방학 집에 돌아와 있는 동안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그는 일본에 가지 않고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반년 만에 중단하고 돌아와서는 고향에 칩거하며 자신의 독서실에서 문학, 철학 등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1919년 12월 당시 16세 소년으로 부모의 뜻에 따라 15세의 울산김씨와 결혼을 한 그는 신학문을 접하지 못한 부인에게 애정을 가지지 못하고 15년 동안 지내다가 이혼하고, 1931년 누이동생의 친구인 임정희와 재혼한다. 이 때 부터 스스로 방황에게 벗어나 눈부신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까지도 순수문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박용철은 영랑의 자문을 받으며 1928년 1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몰두했던 시 창작과, 어학 실력의 향상과 외국시의 감상을 겸한 해외 시 번역이었다. 이 두 가지 공부의 결과 박용철은 순수시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고 1929년 박용철과 영랑은 시 잡지의 출판을 약속한 뒤 어렵게 ‘정인보변영로정지용이하윤’의 동의를 얻어내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가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문학파’의 문학적 방향, 특히 박용철의 새로운 문학에 대한 성취 욕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시문학’ 3호는 일 년 반이나 늦은 1931년 3월에야 출간된다.
그러나 용아의 노력은 끝내 좌초 되고 ‘시문학’ 3호로써 ‘시문학’지는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이동윤과 더불어 1931년 11월에 ‘문예월간’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나, 해외문학을 소개하고 번역 작품을 수록한 이것은 이미 동인지의 성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문예월간’도 4호로써 끝이 났다. 용아는 이 두 잡지에 많은 서평과 번역시를 발표하면서 연극에도 눈을 돌려 ‘극예술연구회’에 입회 기획부 간사를 맡고, 단역을 하기도 했다. 1934년 봄, 그는 ‘문학’이라는 조그만 동인지를 발행하여 시, 수필, 평론, 소설 등을 실어냈다. 이 때 후두결핵에 몸이 쇠약해져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게 되고, 다음해 잠시 병세가 차도가 있자 먼저 을 발행한다. 하지만 8년의 작품 활동 기간 동안 창작시 74편과 번역시 385편을 남기고, 1938년 5월 12일 34세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남성숙(1996), 호남인물100, 금호문화.
2. 순수시론의 전개양상
박용철은 문단에 등장한 이후 시인으로서, 비평가로서, 번역가로서, 문예지 편집인으로서 한국 현대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 많은 업적 중 가장 무게중심이 주어진 것은 비평가로서의 박용철이다. 박용철의 순수시론은 ‘영랑에게 보낸 사신’(1929), ‘시문학 창간에 대하여’(1930), ‘신미시단의 회고와 비판’(1931) 등에서 볼 수 있는 순수시론에서 출발하여, ‘을해시단총평’(1935), ‘병자시단의 일년성과’(1936), ‘기교주의의 허망’(1936), ‘시적변용에 대해서’(1938) 등과 같은 후기의 본격적 순수시론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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