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 이천

 1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 이천-1
 2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 이천-2
 3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 이천-3
 4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 이천-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 이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의 국가경영
(세종시대의 과학자 공학자)
세종 시대 최고의 과학자, 이천
이천은 조선 시대 세종 때의 과학자이다. 충청도병마도절제사였던 이천은 공조참판이란 과학 기술 행정관서의 차관으로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과학 기술자로서의 탁월한 재능과 뛰어난 행정 능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공조참판으로서 이천이 해낸 첫 번째 큰 사업은 청동 활자 인쇄술의 혁신이었다. 1420년 겨울부터 시작해서 1421년 5월까지 완성한 새로운 청동 활자인 경자자와 그 인쇄기의 제작이었다. 그는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기의 표준화를 추진하여 인쇄능률을 2배 이상으로 향상시킨 것이다.
두 번째로 도량형의 표준화 사업에 착수하였다. [세종실록] 4년 6월 20일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임금이 공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이 정확하지 아니하므로, 공조참판 이천에게 명하여 개조하게 하다. 이 날에 이르러 1,500개를 만들어 올렸는데. 자못 정확하게 되었으므로 전국에 반포하고, 또 더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사들이게 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과학자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발달도 있지만, 지도자의 관심과 후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도량형의 표준화 사업은 그 후 자와 되, 말의 정비로 이어져 조선 왕조의 도량형 제도 확립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정치, 경제를 비롯한 왕권의 확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1424년(세종6년)에 이천은 천추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4개월 동안의 중국 여행에서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1425년(세종7년) 12월에 이천은 병조참판으로 임명되고, 다음 해 9월에는 중군총제로, 그리고 1431년(세종13년) 12월에는 우군도총제로 승진하였다. 이렇게 이천은 군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각종 병기의 개량과 조선기술의 향상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요즘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군사 강대국은 바로 과학 선진국’이란 개념을, 세종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과학자로서의 이천의 활동은 1432년(세종14년) 3월에 그가 지중추원사에 임명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천문 기기를 만드는 대 역사를 책임지게 된 것이다. 이 사업은 조선 왕조의 천문학 발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국가적 과제였기에 이천에게 주어진 사명은 막중한 것이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임금이 경연에 나아가 역상의 이치를 토론하고, 예문각 제학 정인지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멀리 해외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시행하는데.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 이미 역산에 관계되는 제조이니, 대제학 정초와 함께 고전을 연구하여 관측 기계를 만들어서 관측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 그러나 그 목적이 북극출지의 값을 결정하는데 있으니, 먼저 간의를 만들어 바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그래서 정초와 정인지는 고전의 연구를 담당하고, 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을 공역을 감독하여 먼저 목간의를 만들어서 한양의 북극출지 38도 1/4을 측정하였는데, [원사]의 측정치와 거의 맞았다. 마침내 구리를 부어 여러 의상을 7년 후인 무오년(세종20년)에 만들어내니, 첫째 대간의, 소가의, 둘째 혼의, 혼상, 셋째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넷째 일성정시의, 다섯째 자격루였다.’ 이러한 대규모 천문 기기들을 설치하기 위하여 경복궁 경희루 북쪽에 간의대를 쌓았다. 천체 관측을 위한 천문 기기를 제대로 갖춘 규모 있는 천문대를 세운 것이다. 이 천문대는 15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천문 관측 활동의 중심이었다.
1433년(세종15년) 8월에 완성된 혼천의가 이천을 비롯한 4명의 과학자에 의해 공동으로 제작되었다. 이때 만든 혼천의는 수격식 시계 장치로 움직이는 혼천시계이다. 이천은 이 물레바퀴로 움직이는 시계 장치의 혼천의를 만드는데 기술적인 책임을 진 과학 기술자였다. 다른 세 사람의 학자들은 문헌과 이론적인 자료를 맡았다. 이천은 혼천시계 기계 장치의 제도와 원리에 능통해 그것을 움직이는 방법 등을 세자인 문종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 혼천의와 혼상을 하나로 연결한 천문시계는 세종대이후 조선 천문학의 기본이 되는 천문 기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천이 만든 수격식 모델은 조선 천문 관측 교습의 표준시계로서 계승되었다.
1451년(문종1년) 11월 8일에 이천은 그 생애를 마쳤다. 그때 벼슬은 판중추원사였다. [문종실로] 권 10에는 14줄에 걸쳐 무장과 과학 기술자로서의 그의 생애를 쓰고 있다. ‘천성이 정교하여 화포, 종경, 규표, 간의, 혼의, 주자와 같은 따위를 모두 그가 감독하고 관장하였다’
그의 업적은 매우 많지만 공학을 배우는 학생으로, 도량형의 표준화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표준화가 바탕에 있어야만 체계적인 기술 분야가 발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공학자, 장영실
장영실은 세종 시대의 공학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때때로 그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공학자로 꼽히기도 한다.
참고문헌
참고자료
조선과학인물열전,김호
한국과학사,전상운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김종록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