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무술유신 戊戌維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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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21장 무술유신(戊戌維新)
저1절 무술유신의 역사적 배경
깊고 널리 퍼진 폐색의 기풍은 자신의 힘으로 타파할 수 없었다. 외환이 자주 닥치고 고통의 징후가 깊이 열린 다음에야 천조의 미몽에서 깨어 날 수 있었다. 외환으로는 먼저 아편전쟁이 있었고, 이어서 영불연합군의 침공을 받았고,마침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만 · 유구 · 면전(緬甸) · 교주(膠州) 등을 상실하고,강녕(江寧) · 천진 · 마관(馬關) 등의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는 고통을 겪었다. 천조의 존엄은 남김없이 손상되었다. 외국 ‘오랑캐’ 들의 부강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천조 백여 년의 법조’를 부득불 고치기 시작했다. 도광(道光)과 함풍(咸豊) 연간 이후 중국이 천시하던 오랑캐들이 갑자기 일어나 천조를 침범했던 것이다. 저들이 강하고 중국이 약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여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만족하고 높이는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사절의 교류는 열국의 병존을 승인한 것이었다. 동문관을 설치하고 유학시킨 것은 서양의 문물이 우월함을 승인한 것이었다. 2천 년 동안의 ‘천하’ 관념이 근본적으로 동요됨으로써 현대국가의 사상이 나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양이 제국주의적으로 침략한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간접적으로 구악을 제거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동치 및 광서 초년의 신정은 조목을 보건대 분명히 부강을 지향했다. 그런데 어찌 30년을 행하고도 부강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하고 급기야 청일전쟁에서 지고 말았을까? 원인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완고(頑固)당의 방해가 심했다는 것과 둘째,유신당의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동치의 신정은 단지 소수의 관리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절대다수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화 · 이의 구별을 굳게 지키고 ‘피발좌임(被髮左)‘을 걱정했다.
무술유신은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에 일어났다. 무술유신은 동치와 광서 연간의 변법운동에서 싹튼 것이었지만,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동치와 광서(光緖)의 변법은 단지 서양의 기기가 쓸 만하고 서양의 기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무술유신은 서양의 정교를 아울러 쓰고 따르려고 했다.
제2절 강유위(康有爲, 1858-1927)의 정치철학
강유위의 원명은 조이(祖)이고,자는 광하(廣夏)이고,호는 장소(長素)이다. 광동의 남해 사람이다. 청의 함풍 8년에 태어나 민국 16년에 죽었다. 어려서는 가학을 계승하여 정주를 따라 성인이 되는 데 뜻을 두었다. 19세에 같은 현의 주차기(朱次琦)에게 배웠다. 주차기는 구강(九江)선생으로 불렸고,한 · 송의 유학을 융통시키는 데 주력하여 하나의 학파에 편중되지 않았다. 주차기는 곧 죽었다. 강유위는 물러나 『예운』에 나오는 ‘대동’ 의 뜻을 탐구하여 『춘추』의 ‘삼세(三世)’의 뜻에 결부시키고,동시에 서양의 학설을 채용하여 『대동서(大同書)』를 지었다. 시작은 27세 때의 일이었다. 광서 14년에는 관리가 아닌 서생 “布衣”으로서 대궐에 엎드려 상서했다. 외국이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중국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고,따라서 조정은 서양을 본받아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지목했고,대신들은 황제에게 전달하지도 않았다. 이에 남으로 돌아가 집회를 열어 강학함으로써 기풍을 개통시키고자 했다. 을미년에 청일강화가 이루어지자 강유위는 북경에서 각 성의 거인(擧人)들을 모아 연명으로 거화(据和), 천도(遷都), 변법 (變法)의 세 가지를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또 홀로 『만언서(萬言書)』를 올려 변법을 더 늦출 수 없다고 주차했다. 광서 23년에 교주만(膠州灣)사건이 일어났다. 강유위는 마침 북경에서 공부의 주사를 맡고 있었는데 황제가 (1) 러시아와 일본을 본받아 국시(國是)를 결정할 것. (2) 인재들을 모아 정치변혁을 꾀할 것. (3) 각 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법할 수 있도록 할 것 등 세 가지 대책을 상서했다. 그러나 공부의 당관(堂官)이 그의 강직함을 미워했기 때문에 황제에게 아뢰지 않았다. 급사중이던 고섭증(高燮曾)이 항의의 상서를 내어 추천했다.
무술년 정월에 덕종은 왕대신에게 강유위를 총리아문에서 불러 보라고 명령했다. 대학사인 옹동화(翁同)는 덕종에게 ‘강유위의 재주는 저보다 백 배 낫습니다’ 라고 말했다. 덕종은 강유위를 소견한 다음 4월 24일에 국시를 결정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강유위는 시독(侍讀) 양예(揚鏡), 중서(中書) 임욱(林旭) , 주사 유광제(劉光第) , 지부(知府) 담사동(譚嗣同) 등과 같이 신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8월 초6일에 태후가 수렴청정의 조칙을 내릴 때까지 약 백 일 동안 팔고를 폐지하고 학당을 열고 병제를 고치고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시키고 언로를 넓히고,광무, 철로, 공상(工商), 농(農)의 국(局)을 세우는 등을 차례로 결정하여 실행했다. 그러나 구당이 방해하고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실제 효과는 작았다. 급기야 태후는 덕종을 영대(瀛臺)에 가둔 다음 신당을 잡아 죽이고 변법에 동정한 내외의 관리들을 파면했다. 강유위는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해외로 도망했다. 강유위는 구미의 13국을 유람한 뒤 16년 만에 귀국했다. 신해혁명 이전에는 보황당(保皇黨)을 조직하여 혁명당과 대항했다. 민국이 들어선 다음에는 『불인(不忍)』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허군공화(虛君共和)’ 를 주장했다. 민국 6년에 자훈(張勳)과 더불어 복벽(復闢)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공혹평길 (共和平議)』를 지어 주장을 펼쳤으나. 동정하는 자들이 거의없었다. 다만 그가 제창한 공교회(孔敎會)는 오랫동안 존속했다.
강유위는 무술유신의 중견인물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당시의 중국이 당면했던 문제에 대한 것이었지만,나름의 이론적 기초를 갖추었다. 강유위는 어려서 유학의 훈도를 깊이 받았는데, 그것이 끝까지 선입견으로서 중심이 되었다. 한 · 송의 유학을 융통했던 주차기의 학문이 전체사상의 주간이 되었다. 뒤로 서양서를 널리 섭렵하여 많이 채용했지만,그것은 그가 세운 유학의 체계를 보충하고 증명하는 자료에 불과했다. 끝내 서양의 것을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했다. 유학을 떠나 서학에 귀의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신과 변법에 관한 강유위의 주장들이 가진 근본적 의의를 밝히려면 먼저 유학에서 연원한 그의 사회사상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강유위는 공자가 중국의 영원한 교주로서 소왕(素王)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자는 스스로 옛것을 따를 뿐,새로이 만들지 않았다〔述而不作〕 고 했지만,실제로는 옛것에 가탁하여 법제를 개혁하려고 했다. 넓게 말해 육경은 모두 교주가 제도의 개혁주의를 주장하기 위한 근거였다. 특히 『춘추』는 소왕이 천하의 영원한 헌법을 밝히기 위해 지었다. 『춘추』의 ‘삼세’ 와 『예기』, 『예운』의 ‘대통’ 은 공자의 교법에서 중심이었다. 공자는 “전해 들은 바〔所傳聞〕의 세상에서는 쇠란으로부터 치세가 일어나는 것을 보였고,들은 바〔所聞〕의 세상에서는 승평 (升平)의 치세를 보였고,직접 본〔所見〕세상에서는 태평(太平)의 치세를 보였다. 삼세라는 것은 첫째 거란(據亂), 둘째 승평,셋째 태평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예운』은 대동을 제시했다. 공자는 언언(言偃)의 물음에 답하면서 ‘천하위공(天下寫公)’을 대통에 해당시키고, ‘천하위가(天下寫家)’ 를 소강(小康)에 해당시켰다. 강유위는 태평세를 대동에 해당시키고,승평세를 소강에 해당시켰다. 거기에 서양의 새로운 학설을 덧붙여서 진화의 사회이상을 제시했다.
맹자는 제선왕이 현자를 등용하는 방법을 질문한 데 답하여 ‘국인이 모두 현명하다고 말한 다음에 살펴서 등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유위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맹자가 특히 승평에서는 민권을 부여하고 의원(議院)을 열어야 함을 밝힌 것이다. 오늘날의 입헌제도는 군민공주(君民共主)의 법이다. 영국 · 독일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 네덜란드 · 포르투갈 · 벨기에 · 일본 등이 모두 그것을 시행하고 있다.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행정관 및 원로 고문관이다. 대부들은 상의원(上議院)을 이룬다. 모든 정법(政法)은 하의원이 인민과 더불어 통제한다. 맹자는 또 ‘민위귀 (民寫貴)’ 라고 말한 바 있다. 강유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것은 맹자가 민주제와 태평법을 세운 것이다. 국가는 인민이 모여 성립된다. 하늘은 인민으로 하여금 이롭고 즐겁게 한다. 국가는 인민 곳곳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모든 예악과 정법은 인민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일은 너무 많기 때문에 인민이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룰 수는 없다. 그래서 공공의 일은 공인(公人)을 거용하여 맡기게 된다. 이른바 군주는 민중을 대신하여 그런 공공의 보전과 안락을 맡는 것이다. 민중의 공적인 천거를 받음으로써 민중에게 공적으로 등용되는 것이다. 인민이 주가 되고 군주는 객이 되며,인민은 주인이고 군주는 노복인 것이다. 그러니 인민이 존귀하고 군주가 비천한 것은 명백하다. 민중에게 귀착되는바 민중에 의해 거용되는 것이니 민주가 되는 것이다.
강유위의 정치철학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요소로 한다. 첫째,공자는 천하와 만세를 위하여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니 국가를 지탱하고 혼란을 뿌리뽑고 치세를 이룰 도는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다. 서양의 국가나 정치도 고금을 막론하고 실제로는 유학과 합치된다. 둘째,정치사회는 난세를 지나 치세에 이르는 진보의 과정을 거친다. 때가 오면 법제도 따라 변하고,때가 오지 않으면 뛰어넘을 수 없다. 셋째,사회의 진보는 거란세를 거쳐 소강 승평세에 달하고,소강 승평세를 거쳐 대통 태평세에 뛰어오른다. 넷째,중국은 진 · 한에서 명 · 청에 이르기까지 거란세를 거쳐 겨우 승평세에 도달했다. 그러니 마땅히 소강의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다섯째,대동은 인류의 이상이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가족과 국가와 일신의 경계를 폐지하고 박애를 바탕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데 있다. 강유위는 27세 때에 이미 흉중에 그런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60이 넘도록 그의 언론은 젊은 때의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청말에 유신과 입헌을 주장하고 민국초에 민주공화를 공격한 것도 거란 승평 태평의 3세와 대동 소강의 2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