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이해] “종교로 본 인간의 역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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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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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내용요약
1. 제 1단계 : 인류 초기의 다신교적 믿음
2. 제 2단계 : 다신교에 대한 도전과 세계종교의 탄생
3. 제 3단계 : 종교개혁
Ⅱ. 비평
본문내용
2. 제 2단계 : 다신교에 대한 도전과 세계종교의 탄생
1)제 2단계의 발단
(1)석가모니와 불교
가장 일찍이 가장 체계적으로 다신교적 믿음에 도전하고 이러한 정신세계에서 벗어난 대표적 인물이 인도의 석가모니였다. 그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하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을 통해 인간은 누구에 의해 구원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이 힘으로 깨달을 수 있는 존재라 보았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깨달아 부처이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불성’을 누구나 타고 난다고 하였다. 또한 석가는 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신격화도 거부하였다.
(2)공자와 유교, 노장과 제자백가
석가와 비슷한 시기에 신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믿음에 도전하고 나온 분이 공자였다. 공자는 인간세상을 신이 지배한다고 믿는 정신세계에 단호히 도전하였다. 공자는 신을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하는 상반되는 말을 하였다. 이는 당시 시대상으로 봐서 신을 부정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단호히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긍정한 것은 조상신의 존재 자체보다는 제사 의식을 통해 ‘효’라는 윤리 도덕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자나 맹자는 ‘하늘의 뜻(천명)’을 통해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나 도덕의 기준인 ‘인간의 뜻’을 말하였다. 그리고 유교는 무신론을 추구했다.
도가의 대표자 노자와 장자 역시 기본적으로는 신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 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말한다. 이러한 ‘도’는 공자가 말한 ‘천명’과 일맥상통한다. 진리의 절대적 기준을 ‘신’이 아닌 ‘도’로 설정한 것이 특히 그러하다.
또한 법가에서는 강제된 윤리 도덕인 ‘법’을 최고의 가치로 보았다. 그러나 묵가에서는 신을 긍정하였다. 신의 존재 자체를 믿었다기보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것이 인간의 교화와 세상의 혼란을 극복하는데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이 시기의 제자백가는 종전까지의 신 중심의 가치관에 도전하여, 신을 부정하고 인간 중심의 윤리․도덕 체계를 수립하려 한 것이다.
(3)그리스의 유물론 철학자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신이 인간세계를 지배한다는 믿음을 배척하고, 그 믿음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윤리와 도덕과 가치를 부정하였다. 이는 신을 부정하고 모독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석가모니의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통하는 말이다. 신에 의해 지배된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4)예수와 기독교
예수는 앞에서 살펴 본 석가․공자․그리스 유물론 철학자와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앞의 사상가들은 다신교 뿐만 아니라 신 자체를 부정한데 반해 예수는 신을 긍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신교적 믿음에 도전하였던 점에서는 동일하다. 예수는 유일신으로 가장 늦게 도전하였지만 기독교의 파괴력에 있어서는 가장 강력했다. 인도와 중국에서 무신론이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의연히 다신교적 신앙이 한쪽 자리를 차지하거나 다시 부활하여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반면, 유일신 신앙의 기독교를 수용한 지역에서 다신교적 신앙이 거의 발을 붙이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5)마호메트와 이슬람교
시기적으로 가장 늦었지만 다신교적 믿음을 가장 철저하게 깨뜨린 또 하나의 종교가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다. 마호메트의 유일신은 삼위일체의 기독교식 유일신 사상과 달리 예수와 자신의 신격화를 부정하는 철저한 일원론적 유일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신이 아닌 최후의 예언자라 하고, 자신의 신격화를 금지하였다.
2)제 2단계의 전개
(1)불교의 발전과 동방 전래
불교는 발전과정에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라는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졌다. 소승불교는 엄격한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존재인 아라한을 목표로 하고, 대중의 구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의 구제를 우선한다. 두 종파는 이러한 차이 외에 석가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다. 소승불교는 석가를 깨달은 인간으로만 여기지만, 대승불교는 석가를 신격화한다. 대중의 구제에 있어서 석가의 신격화는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대승불교의 성립은 불교를 세계종교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지만, 인도에서의 불교의 쇠퇴를 가져왔다. 석가를 신격화함으로써, 다신교의 힌두교와의 차이가 희미해졌고 민중들은 민간신앙과 잘 결합된 힌두교를 선호하게 되었다.
(2)유교의 영광과 오욕
공자나 맹자는 신의 자리에 도덕과 윤리를 가져다 놓았다. 이들은 석가와 같이 인간은 더 이상 신에 의해 구원되어야 할 존재로 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신도 필요치 않았다. 이들은 윤리와 도덕 지상주의의 입장에서 당시 유행하던 법률 지상주의를 우습게 여겼으며, 진정한 부국강병은 법을 강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매일 싸움으로 지새던 살벌한 시대에 이는 너무나 안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춘추전국 시대를 종식시킨 것은 법률 지상주의자였고, 그 대표자는 진시황이었다. 그러나 진나라도 십수년만에 패망하고 유가가 천하통치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가 국교화 된 것은 인간 스스로의 윤리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고 가르쳐 이상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교는 영광의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유교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큰 이유는 고도의 철학성을 갖춘 불교와 도교의 성행일 것이다. 또한 유교가 무신론에 기초함으로써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이기주의에 큰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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