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교육속의 일제잔재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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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교육속의 일제잔재요소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4대 독자 외아들의 교육 때문에 이민을 간 어떤 아버지가 어느 날 자식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받고 교장실을 찾아갔다. 교장으로부터 당신아들의 학업성적이 형편없을 뿐 아니라 못된 아이들과 어울려 말썽을 일으키고 학교에 출석도 잘 안하는데, 집에서 좀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말을 들은 이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있던 터라 집에서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는 지적에 그만 기가 죽어서 교장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워낙 무식해 놔서 자식교육에 대해 뭘 모르니 어쩝니까, 모든 걸 교장선생님께 맡기겠으니 제발 제 자식 사람 좀 만들어 주십시오. 자식교육 하나 제대로 시켜 보려는 욕심 때문에 미국까지 이민 온 처지에 뭘 더 바라겠습니까, 교장선생님 처분만 따르겠습니다.”하는 내용의 부탁이자 하소연을 한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부탁일 수 있다. 제 자식을 학교에 맡기면서 학부모들이 으례껏 할 수 있을 법한 인사치레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교장 앞에서 통역을 맡은 교포 2세 교사를 증인으로 하여 자식의 교육에 대해 스스로 무자격자임을 고백하고 교육권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교장에게 모든 결정권을 위임해 버린 이 아버지는 얼마 후 자식을 남의 집 양자로 보내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한국의 학부모들이 흔히 교사에게 인사말로 하는 겸양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아버지는 법정에서 변호사와 문화인류학자까지 불러대느라 수만 불을 날렸다는 소문이다.
우스개 소리로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교육에 대한 통념, 곧 교육은 학교에서 하는 것이라는 학교교육 절대주의야말로 우리교육이 오늘과 같은 파행의 길을 걷게 된 근본원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제도적 교육기관에서 베풀어지는 교육만이 문화적으로 절대권위를 지닐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적법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과 기준이 된다고 믿는 고정관념은 우리문화의 교육적 전통과는 무관한 일제 식민지교육의 잔재라고 규정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교육 속에 남아있을 뿐 아니라 한국교육의 성격과 방향을 지배하고 있는 일제잔재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본문내용
1. 제도교육 절대주의
모든 식민지 교육정책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바로 학교라는 제도적 교육의 가치와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이다. 제도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을수록 문화교육의 영향이던 전통적 규범, 도덕, 가치관, 지식, 생활방식 등을 경멸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제 나라의 말과 습관을 수치스럽게 여기게까지 되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실시한 교육정책의 폐해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고정관념처럼 지니고 있는 제도교육 절대주의의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열 상승의 배경요인 중에는 바로 학교교육만을 절대시하는 파행적 교육관이 작용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학교교육에 대한 지나친 기대→상대적 실망
교육열 그 자체는 국민적 활력일 수 있고 따라서 무조건 비난하거나 억제할 일은 아니겠지만 학교교육만큼 학교밖에서의 교육의 비중, 가치, 의미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국민 개인들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차원에서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 제도교육 내에서의 과밀학급과 획일주의
일제는 한국인들에 의한 각종의 사립교육기관을 폐쇄하면서 교육기회를 극도로 제한하는 한편 초등교육기관을 확대하는 우민교육정책을 전개하였다. 학급당 학생수는 1912년에는 일본인 학급과 같이 40명씩이던 것이 1941년에는 일본인 학급은 39명으로 줄고 한국인 학급은 73명으로 늘었다. 한마디로 지난 40여년간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보편적 특징인 것처럼 간주되어 온 과밀학급이라고 하는 병폐와 이에 대한 교육계와 사회의 일반적 무감각 증세는 바로 일제식민지 교육의 잔재이다.
우리교육이 정상화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각급학교의 과밀학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교육계가 놀라울 정도로 과밀교실 조건에 대해서 너그러웠던 것은 결국 일제 식민지시대의 교육조건을 정상적 교육의 기준으로 인식하려는 무의식적 성향이 우리 교육계 속에 남아 있었던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학교교육이 집단적 획일주의 훈련원칙에 따라 수십년간 전개되어 옴으로써 우리국민의 대부분이 부지불식간에 획일적 통제위주의 군사문화에 적합한 사고체계와 행동양식에 익숙해 있었던 것도 바로 과밀학급에 대한 교육계의 무감각에서부터 원인의 일단을 찾을 수 있겠다.

3. 사범교육정책
일제는 피지배층 속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식민지 우민교육정책 수행의 앞잡이로 활용하는 사범교육정책을 전개하였다. 일제 사범교육의 성격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표(師表)로서의 교육자가 아니라 기능인으로서의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교육의 목적과 철학에 대한 주체적 사고나 반성의 능력보다는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내용을 충실히 전달학습시키는 기능인 양성이 사범교육의 목적이라는 이런 기준에서 교직을 규정하고 평가하는 일제 사범교육의 잔재는 우리 교육계 속에 어느 오늘날까지도 뿌리깊게 남아있다. 전통적으로 교직단체가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해 왔던 사실, 일선 교직자를 관권의 하수인처럼 취급하는 행정관료 문화의 행태 등은 바로 일제식 교육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 우리 교육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교원노조문제의 연원(淵源)과 배경속에서도 우리는 정부당국의 구태의연한 일제식 교육관의 잔재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