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와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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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반민특위와 국가폭력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친일파 세력의 대두
2. 세계의 반민족 행위자 처벌
3. 반민특위 활동
4. 반민특위에 잡아들인 반민족 행위자
5. 반민특위에 가해진 국가폭력의 원인
6. 반민특위 활동에 대한 국가폭력의 개입
7. 반민특위 해체 과정
8. 반민특위 와해
9. 반민특위 와해 이후
10. 반민특위 한계와 의의
11. 결론
본문내용
1. 친일파 세력의 대두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948년 남한 단독선거를 통하여 200명의 제헌국회의원으로 이루어진 국회가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선출된 국회의원들과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하려고 한일이 바로 친일파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미군정 치하에 있었는데 미 군정은 친일파를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이용하였다. 미 군정이 친일파를 활용한 공식적 이유는 친일파들의 기술능력과 행정경험이었으나, 실상 친일파들이 일본을 위해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미국을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의 친일파 활용정책에 따라 미 군정청 행정관료는 주로 친일파와 친일파 비호집단으로 알려진 한국민주당 계열에서 충원되었다. 뿐만아니라 경찰에서는 친일파의 등용이 더욱 심하였다. 1947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1명이 일제시기 군수 출신이었고, 9명이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경기도내 21개 경찰서장 중 추천으로 된 8명을 제외한 13명이 모두 일제시기 경찰에 복무한 경력의 소유자엿다. 1946년 11월 현재 재직중인 경위 이상 경찰 총 1157명의 82%인 949명이 일제시기 경찰 출신이었다. 이를 보았을 때 친일 경찰은 미 군정기에 오히려 승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세계의 반민족 행위자 처벌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나치 협력자로 150~200만 명이 조사를 받았다.
이 중 3~4만 명이 재판을 받고 구금되었고, 1만 여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8000여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모리스 파퐁 (Maurice Papon)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99년 10월 프랑스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모리스 파퐁의 재판으로 떠들썩하였는데 모리스 파퐁이라는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자신이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였다는 경력을 내세워 코르시카와 알제리 행정장관(1947-1951년)을 역임했고, 드골 정권하에서는 파리 경찰국장, 지스카르 데스땡 정권 때에는 예산장관까지 역임할 정도로 권력자였다.
그러나 40년간이나 지하에 묻혀 있던 그의 범죄는 마이클 슬리틴이라는 역사학자에 의해 모두 폭로되고 말았다..
마이클 슬리틴은 파퐁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1981년에 한 주간지에 파퐁의 반인륜적 범죄를 낱낱이 증언하였다.
모리스 파퐁은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비시 정권하에서 보르도 지역의 치안 부책임자였다.
그는 1942년에서부터 1944년까지 1,590명의 유태인을 체포하여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낸 바 있다.
희생자 유족들의 고발로 모르스 파퐁은 결국 1983년에 정식 기소되었다. 그러나 모리스 파퐁을 법정에 세우기까지는 16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한동안 비시 정권하에 있었던 관리들의 수동적 행위를 단죄할 수 있는가의 논란이 야기됐기 때문이었다.
파퐁 자신도 "공복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또한 파퐁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사실 확인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드골 정권 등 전후의 정권에 대한 평가와 역사 해석 문제와 맞물려 여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1995년 쟈크 시라크 대통령이 취임하여 유태인 강제수용에 대한 프랑스의 국가적 책임을 처음으로 시인한 후에야 비로소 모리스 파퐁에 대한 응징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 보르도 항소법원이 모리스 파퐁을 재판에 회부했고, 6개월 후에 그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문헌
반민특위 연구, 이강수, 2003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허종,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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