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사] 동방교회와 주후500년이후의 종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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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사상사] 동방교회와 주후500년이후의 종교회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칼케돈 회의(주후 451)
1) 회의가 열린 이유
2) 회의의 결과
Ⅲ.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주후 553)
1) 회의가 열린 이유
2) 회의의 결과
Ⅳ.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주후 680)
1) 회의가 열린 이유
2) 회의의 결과
Ⅴ. 니케아 종교회의(주후 787)
1)회의가 열린 이유
2)회의의 결과
Ⅵ. 나가는 말
참고도서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신약교회 후 교부들의 시대까지는 세계적인 종교회의가 없었다. 그러나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부터는 세계적인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전까지 기독교는 박해와 핍박을 받아오다가 비로소 세계적으로 종교회의를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후 500년 이후 이루어진 교회의 분열, 즉 서방 카톨릭과 동방정교회 사이의 차이를 칼케돈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니케아 종교회의 등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칼케돈 회의(주후 451)
1) 회의가 열린 이유
에베소회의가 끝난 후에 문제가 발생한다.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이라고 배척한 시릴당 중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유티케스(Eutyches)가 신인양성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성의 구별을 어렵게 만든 것에 주된 원인이 있었다(그리스도의 신성을 극단적으로 강조-단성론). 마이클 콜린스, 『기독교 역사』 (서울: 시공사, 2001), 62.


즉, 유티케스에 의하면 성육신 때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은 하나의 신인단성(Monophysitism)으로 연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유티케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간의 인성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같은 극렬한 대립을 중재하려고 로마 감독으로 있던 ‘레오(Leo I)’의 주선으로 주후 451년에 테오도시우스 후임인 ‘마르키아누스(Macrinus)’의 명으로 ‘칼케돈회의’가 소집되었다.

참고문헌
1. 정수영,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서울 : 규장, 1992)
2. Tony Lane(김응국 역), 『기독교 사상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3. 존 D. 한나(장광수 역), 『차트 고대와 중세 교회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4. 윌리스턴 워커, 『기독교회사』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3).
5. 마이클 콜린스, 『기독교 역사』 (서울: 시공사, 2001).
6. 앨리스터 맥그래스, 『신학의 역사』 (서울: 지와사랑,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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