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여객장서 與客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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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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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여객장서 (與客將書)
- 목 차 -
1. 작가소개
2. 원문
3. 작품설명
4. 패러디 “”
-후기
-참고문헌
1. 작가소개 한국사학회ㆍ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편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주류성 2001
디지털한국학 한국의 역대인물 (http://www.koreandb.net/)
최치원은 신라 헌안왕 1년(857년)에 출생하였는데, 『삼국사기』최치원전의 기록을 보면, 최치원은 왕경 사량부(王京 沙梁部) 사람으로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運)이며 시호(諡號 )는 문창후(文昌侯)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은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中山覆#궤20集》 1부(部) 5권이다. 그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위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변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였다. 그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 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 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 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 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하여 만든 해인사(海印寺)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두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져 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당시의 처참한 상태를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890년에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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