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白石)론 - 생애와 활동 & 작품경향에 따른 문학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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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석(白石)론 - 생애와 활동 & 작품경향에 따른 문학적 특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백석(白石)론
1. 생애와 활동 이숭원(2006),『백석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 장석주(2009),『나는 문학이다』, 나무이야기
백석(1912~1995)은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석동에서 부친 백시박과 모친 이봉우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918년 오산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924년 오산고등보통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오산고보 시절 백석은 선배 시인 김소월을 선망 김소월과 백석은 타향살이를 하며 ‘고향, 인정’등에 관련된 시를 많이 남긴다. 김소월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인정, 사랑에 토대를 둔 유대관계의 동경 등은 백석의 문학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하며 문학과 종교(불교)에 관심을 보였고, 문학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소질이 있는 학생이었다.
1929년 3월 오산고보 졸업 후, 집안사정으로 상급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지내다 19세가 된 1930년 1월,《조선일보》신춘 문예 현상 모집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1등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선일보사 방응모의 장학금으로 일본 동경의 기독교 명문대학인 청산(靑山,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에 다니게 된다.
1934년 청산학원 졸업 후 귀국하여 바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교정부 기자로 근무하며 계열 잡지인《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이후,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등 틈틈이 번역 산문을 발표하고, 1935년 7월에「마을의 유화(遺話)」라는 첫 창작 소설 백석의 초기 단편들은 「노쇠한 부부」,「죽음」 등 삶의 어두운 부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부문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런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다.
을 연재하며 활동하다 같은 해 8월에 시 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한 후, 종합지《조광》에 6편의 시를 발표하고, 다음해인 1936년 1월에 시집《사슴》 첫 시집 《사슴》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시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발간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을 간행하는 등 시작 활동에 주력 백석의 시작활동에서의 특이점은 어느 유파나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혼자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는 점이다.
하게 된다.
1937년 겨울,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위해 함경도로 내려간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백석의 시에 있어서 ‘김자야’와 ‘박경련’을 중심으로 한 여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시에 나타나있는데, 1937년 당시에 호감을 갖고 만나던 박경련과 의 결혼에 실패한 후 외로움과 막막함을 누르기 위해 기생집에 들러 김자야라는 여인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여성》지를 통해 1937년 10월에「바다」를, 1938년 3월에는「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발표하였고, 김자야와 동거하며 조선일보 출판부에 재입사하였으나 1939년 10월에 다시 사직하고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얼마동안 근무하다 뚜렷한 직장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고향인 평북 정주로 귀향하여 평양음악학교 교사 문경옥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하고, 이윤희와 재혼하여 삼남 이녀를 두게 된다. 이후, 1956년까지 여러 책을 번역하고「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등의 아동문학에 관련된 글을 발표한다. 북한 사회가 교조화되면서 농장으로의 이주 명령을 받아 농사일을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다시 시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나, 1962년 10월 북한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 비판과 연계되어 일체의 창작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 후, 1963년에 협동농장에서 일을 하다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2000년대 초 이산가족상봉 등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북쪽의 이윤희와 연락이 닿아 백석은 1995년 1월 84세의 나이로 타계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