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개론]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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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개론]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을 읽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을 읽고』
나는 어렸을 때 불교신자인 친가와 기독교신자인 외가 사이를 자주 왕래하면서 두 종교를 개인적인 갈등 없이 받아들이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불교를 내 종교로 선택했는데, 그렇다고 기독교, 천주교에 대한 배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마음의 안정을 내 안에서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성장기에 부모님으로 인해 자주 노출 되서 받아들이기 쉬웠던 불교를 종교로 선택한 것 일뿐,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는 비교를 통해 종교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주최하는 연탄봉사에도 거리낌 없이 참여했고, 친한 친구가 가정적인 고민으로 힘들어할 때는 같이 교회에 가서 그 친구의 고민을 목사님과 함께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청년회에서 사찰에 대한 모독행위로 떠들썩했던 2011년에는 천주교를 믿는 친구와 감정적인 말다툼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것으로 한 집단을 설명하는 것은 나의 오만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만나서 종교에 대한 비교를 해본 경험은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불교에 대한 믿음이 커지던 시절, 군대에서 자대배치를 받고 불교 군종병을 했는데, 1년 동안 매주 군종병 생활을 하면서 신자로서 뿌듯한 활동도 있었지만, 법사와 신도들의 행동을 보면서 종교인도 신자와 다름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허물을 완전히 벗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종교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 교리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으로 불교를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이어오면서 인간이 만든 ‘종교’의 한계와 권위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행위의 이유에 관심을 가졌다.
세상에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처럼 오래 지속되어온 종교 이외에 흔히 이단이라고 불리는 근원종교에서 벗어나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는 종교단체부터 아예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 신도들을 포섭하는 신생종교까지 수많은 종교가 현재 한국에 존재하고 지금까지 이단과 신생종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일부 시사고발 프로그램으로 인해 수면위에 종종 등장했지만 그 사회적 관심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에 세월호 침몰사건을 조사하면서 세월호를 운영하는 청해진해운이 이단으로 알려진 구원파가 운영하는 회사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번진 이단에 대한 관심은 초기 사건 대응에 미흡했던 정부가 사회적 이목을 유병언 씨에게 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 느껴지지만 강렬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단으로 불리는 종교에 대한 공부도 없이 그 종교의 창시자를 그 종교의 신도를 모독할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그런 이유로 창가학회라는 신생종교를 믿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창가학회가 이단으로 느껴지지 않고 하나의 성숙한 종교라고 느껴지기 까지 했다. 창가학회의 운영방식과 교리, 운영 분위기는 이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놀라웠고, 그것을 믿는 재일한국인과의 면담 내용은 감동적이었다.
사람이 다른 나라에서 그들의 삶의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일본에 가든, 미국에 가든 ‘한국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한국의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타국에서 정신적인 뿌리를 갖고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소개된 재일한국인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 사람의 자손으로 일본이 패망한 이후 그들의 선조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일본의 경제적 조치로 일본에 말이 묶이면서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일본은 그들 선조에게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처럼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는 경우 일본국적을 주지 않고 각종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버리길 유도했고, 그 이점으로 인해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정체성의 혼란을 같이하던 재일한국인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으며 살아왔다. 또한 일본 사회역시 일본 학교가 아닌 조선 학교를 졸업한 재일한국인의 경우 취업시장에서 차별을 했다. 지금까지 쓴 일본 사회의 차별은 역사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해보였지만, 한국정부가 우리사회가 재일한국인들을 버렸다는 것을 볼 때 슬픔이 올라왔다. 재일한국인이 양 국가 사이에서 어떤 정체성도 확고하게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겪었을 당혹감과 슬픔 그리고 혼란이 느껴졌다. 만주 쪽 조선족을 보면 못사는 국가에서 온 동포라고 하대하고,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은 잘사는 적대국가에 사니까 우리가 도와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가 참 못나 보였고 나 스스로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작은 한인공동체로는 그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재일한국인을 차별 없는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주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주는 ‘창가학회’가 그들에게 퍼지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들이 흡수되고 싶어 하던 일본사회가 싫어하는 종교였지만, 그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통해 개인이 성장할 수 있는 뿌리를 만들어주는 종교에 대한 매력을 뿌리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창가학회는 제목인 ‘남묘호렌케쿄’를 암송하는 단체로 여기서 창가란 ‘가치 창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국의 불교와 다르게 수련을 하는 승려 중심의 단체인 일련정종과 신도 단체인 창가학회가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상당히 새로웠다. 한국의 불교의 경우 승려를 중심으로 신도가 뭉치고 신도들은 주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신앙을 넘어 종교인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이와 다르게 이 종교는 사제와 신도 간 분리로 신도들 간의 교류를 더 활발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주고, 승려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도 줄여서 개인의 순수한 믿음에 보다 가깝게 만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그리고 또한 신도들 중에 역직을 맡는 경우 신도사이에서 활발한 참여를 통해 인물을 선출하는 것과 1년에 한번 걷어지는 헌금과 그 운영에 있어서 월급을 받지 않는 간부들의 모습은 정말 이상적으로 보이기 충분한 종교 단체였다.
하지만 너무 깨끗해 보여서 의심이 드는 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나도 불교가 깨끗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종교가 깨끗해야만 한다는 이유가 필요할까? 그렇다면 나는 종교에 대해 비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위 내용을 읽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생기는 면도 있었다. 종교를 근원에 둔 정당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볼 때 창가학회를 근원으로 하는 공명당의 활동은 신선해보였지만 정치가 원래 이익을 갖고 싸우는 집단의 싸움임을 생각했을 때 적어도 순수한 신앙을 추구해야할 종교가 끼어들 장소가 아닌 곳에 들어갔다고 느끼는 점도 있었다. 이 책의 면담내용을 읽으면서 내가 당연하다고 느꼈던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