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역사를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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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역사를 살다』
1. 기장 50년의 회고와 전망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분립 된지 50년. 성서적 의미로 희년이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왜 분립 50주년을 말하고자 하는가, 왜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기장의 ‘새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 ‘새 역사’란 무엇일까?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차원의 초시간적인 새 역사가 아닌 성서의 중심 주제인 희년을 이 땅에 실천하는 선교 운동적 차원에서의 새 역사를 뜻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은 조선신학교로부터 연원한다.
대다수 신학교들은 교회에 의해 설립되어졌지만, 대조적으로 기장은 신학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자는 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둘러싼 장로교의 교권 갈등과 신학 논쟁을 통해 기장 분립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1945년 8·15 해방은 남과 북의 분단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미완성이었다. 따라서 8·15 해방은 일제 잔재 척결, 주체성 있는 한국교회 등의 역사적 과제를 동시적으로 부여했다. 일제감정 시기 한국교회는 강압적인 통합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 이 후에 감리교를 선두로 각 교파가 교파 환원을 선언한다. 이에 장로교도 남부 총회로 모이게 된다. 이 총회를 통해 헌법, 신사참배, 남부 총회 직영신학교, 여자 장로직의 문제가 중요한 사항으로 결정된다.
남부 총회 직영신학교가 조선신학교로 지명되어지면서 조선신학교의 설립 시기와 성격 문제로 한국 교회의 보수 교권주의자들로부터 많은 논란과 비난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학의 자유’를 ‘자유주의 신학’으로 오해, 둘째,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폐교 시기와 조선신학교의 개교 시기가 비슷하여 친일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잘못된 역사적 맥락의 이해, 셋째, 에큐메니칼 신학을 지향하는데 있어서 반 선교사적 의도가 있었다는 오해이다.
1940년부터 일제 말까지 굴욕적인 간섭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해방된 한국교회의 미래상을 바라보며 이겨냈다. 교단이 결정적으로 분열 되게 된 이유는 북한의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온 개신교 지도자들과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돌아온 외국 선교사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보수화와 교권주의 파장에서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이들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많은 논쟁과 논란을 겪게 되면서 분열이 형성된다.
기장이 예장과 나누어지면서 새롭게 정립한 개념이 ‘새 역사 운동’이었다. 보수적, 교권적인 선교사들을 의존하는 성격을 개혁하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계승하면서, 또한 역사 참여를 통해 민족 현실 속에 선교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편으로는 기장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제도 혁신과 실천적 선교 사업을 전개하였다.
한국교회사에서 기장의 의의는 이 땅의 정의와 진실, 평화를 위해 소리 없이 녹고 자기를 버리는 소금의 역할을 해 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 송암은 기장 역사에서 다시 살펴볼 주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들지 않았지만, 3·1운동의 주역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신학교 개교를 준비하는 장로회신학교 설립기성회 실행위원회를 발족한 인물로, 조선신학교 개교의 주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주적임과 동시에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소금처럼 녹아지기를 원하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즐겨하지 않는 겸손하면서도 참여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송암의 내면동력은 ‘목민영성’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지녀야 할 영성이 아닐까 싶다.
세계 교회의 해방 전통으로서 하나님의 선교와 초기 한국 교회의 근대화와 민족 독립의 해방 전통을 계승한 기장이 역사 현실에 대해 눈 뜬것은 1960년 4·19혁명이 기점이 된다. 남과 북이 분단이 되고 난 후 의미 없는 전쟁을 통해 서로에 대한 원망과 증오만 쌓게 된다.
하지만 그 한에 의해 세워진 제 1공화국 이승만 정권은 부패와 부정, 그리고 독재의 독버섯만 키워 갔을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이라는 민주화 혁명의 역사적 심판을 받고 무너졌다. 기장이 민주화 통일 운동의 선두 주자로 나가게 된 것은 1970년에 들어서이다. 제 1공화국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그리고 반민주악법인 유신헌법을 제정한다.
유신 체제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기장 교외 안에서부터 일어났다. 유신 헌법을 부정하는 설교를 하는 기장교회의 여러 목사님들이 유언비어 유포 죄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로 몰아 구속하자 총회는 인권협의회를 개최하여 인권운동을 전개하였고, 한신대학도 이에 동참하여 유신 체제의 부당성을 알리며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기장은 민주화의 대장정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 앞에서 기장은 ‘무엇을 선교하고 고백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가지게 된다. 이 반성을 통해 기장의 새 역사를 가꿔 나가는 노력의 밑거름이 되어 하나님의 의와 나라의 실현을 위한 고난의 행진을 해 온 기장의 역사의 희년 이 후 새롭게 미래를 책임져 나갈 기장의 선교적 소명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