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신학사상사] 토착화 신학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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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신학사상사] 토착화 신학 논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토착화 신학 논쟁
들어가는 말
196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는 “토착화”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박봉배는 세계 제2차대전 이후 토착화 신학 논쟁이 선교지에서의 신학자들 사이의 가장 관심 있고 활발한 신학적 논쟁이었음을 지적하며 특히 기독교가 서구의 식민지주의 배경 하에서 전수된 나라에서 더욱 그러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서구의 식민지주의를 경험하지 않은 우리나라는 1962년 E.A.C.C.가 주동이 된 온양협의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1963년에 이르러 신학자들 사이에 유례없이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박봉배, “토착화 신학과 한국 개신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87. 5), 46.
이러한 토착화 신학 논쟁에 대해 김경재는 한국 기독교 100년사에 있어서 1960년대 토착화 논쟁만큼 생산적이고 의욕적인 노작은 성서연구방법론 논쟁이 있었던 1950년대 사건을 제외하면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밝히며 신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등 다각적 측면에서 기독교 토착화론이 거론된 데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김경재, “복음의 문화적 토착화와 정치적 토착화”,「기독교사상」(1979. 9), 59.
주지하듯이, 토착화 신학은 유동식, 윤성범 등 감리교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처음 전개되었다. 그리고 전경연이 유동식의 글을 반박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이장식, 이종성, 윤성범, 한태동, 정하은, 이규호, 장일조, 홍현설, 한철하 등 십여 명이 가세하여 일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본 발제에서는 유동식과 전경연의 토착화 신학 논쟁을 중심으로 하여 후에 가세한 이장식, 이규호, 이종성 등의 논쟁을 다루고자 한다.
1. 유동식의 토착화론
토착화론에 대한 유동식의 관심이 표출된 것은 일반적으로 그가 감신 학보에 토착화 관련 글을 기고한 1962년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정배는 유동식이 배화여고 종교주임이던 1956년에 “요한복음과 노자”라는 글을 썼으며 그 글에서 이미 주체적으로 사유해야 할 당위성을 표현하였다고 말하며 이를 근거로 유동식이 기독교 진리와 동양사상의 일관성을 처음 숙지한 시점이 알려진 것보다 5-6년 앞서 있음을 지적한다. 이정배,『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202.
토착화에 대한 유동식의 신학적 관심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인도의 감리교 감독 나일즈(D. T. Niles)였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Ⅲ』(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200.
나일즈는 “서양 선교사들은 서양에서 자라난 교회라는 화초를 서양의 흙을 담은 화분에 심어 가지고 이곳에 들고 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땅히 이 화분을 깨뜨려서 우리들의 옥토 속에 이 화초를 심어 힘차게 자라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D. T. Niles, “성서연구와 토착화 문제”,「기독교사상」(1962. 10), 67.
유동식은 이에 자극을 받아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이 토착화 논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Ⅲ』(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200.
유동식은 다음과 같이 토착화를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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