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당시 조선을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청 일의 세력관계 속에서 외국(청)의 무력개입에 의해 패배하면서부터 민씨정권의 대외의존성은 더욱 심해졌다. 정치적으로는 청이 우세한 가운데 경제적 침략을 둘러싼 청 일의 각축전 또한 치열하였다. 특히 일본은 청이 임오
② 방랑기 (放浪期) : 21~30세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단종이 유충으로서 등극하였다가 곧 세조에게 찬찬을 당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21세인 시습은 대성통곡하면서 서적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머리를 깎아 중이 되어 금강산에 들어가서 「오세암」이란 암자를 지어놓고 거처하면서
이율곡은 김시습이 "성질이 굳세고 곧아 세속을 분개하여 심기가 답답하고 편안하지 못하매 스스로 세상을 따라 오르고 내릴 수 없음을 헤아린 나머지 드디어 그 몸을 내던져 세상밖에서 놀았다."고 하였다. 김시습 자신은은 "선비는 자신과 세상이 모순이 있으면 물러가 살면서 自樂하는 것이 대체로
정신 [ 精神, mind ]
넓은 뜻으로는 마음이나 혼(魂)과 같이 쓰인다. 철학에서는 대개 진리인식 ·도덕 ·예술에 관한 고차원의 심적 능력, 이성(理性)을 가리킨다. 정신 ·마음이라는 우리말의 구별은 흔히 영어의 ‘spirit’와 ‘mind’, 독일어의 ‘Geist’와 ‘Seele’, 프랑스어의 ‘esprit’와 ‘me’이라는
Ⅰ. 서론
조선은 개항한 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자체적으로 사회 내의 모순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은 자체 내의 모순을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고 외국 자본주의에 계속 압도되어, 끝내는 일본에게 국권
매월당 김시습은 신라시조 김알지의 후손이다. 선대에는 왕족들과 대문장가등의 화려한 가문이었으나 그는 한미한 하급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조부에게서 千字文을 배우고 2세에는 한문에 통하였으며, 3세에는 作詩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正俗」.「字說」.「小學」등을 배웠다
1. 시조의 개관
시조는 고대 시가의 전통에 그 기원을 둔다. 그 후 중세․근세를 거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 민족의 호흡에 가장 알맞은 시형으로 계승 발전되어 온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시조는 한국 문학사가 남긴 작품들 가운데 양적으로 가장 압도적이다. 그리하여 시조는 가장 오
1. 개화의 의미
개화라는 말은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바를 개발하고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게 한다는 뜻의 개물성무라는 말과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든다는 뜻의 화민성속의 두말을 합친 것이다. 일본에서는 개화라는 말이 명치 초년에 문명이란 말까지 앞에 붙여서양문화
1. 우국적(憂國的) 한시문학(漢詩文學)
(1) 황현(黃玹)과 김택영(金澤榮)의 한시
황현(1855~1910)과 김택영(1850~1927)은 한말에 가장 많은 우국적 시편을 남긴 문인이다. 이들은 한문학 형식의 우국문학을 한 사실은 같으나, 그 체질상 차이를 보인다. 황현을 비판정신을 가진 선비라 한다면, 김택영은 자부
ⅰ. 개관
국사편찬위원회는 민족문화를 계승 발전하고 일제침략에 의하여 단절된 한국사 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 역사를 연구·편찬하기 위해 설립된 국가의 공적인 사료연구 편찬 기관이다. 1946년 3월에 창설된 이래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1,000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