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꼭 존재해야 할 위치에도 공백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불교미술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순수한 자연발생적 신앙의 동기를 읽을 수 있다. 불교의 양대 예배 대상을 불탑과 불상에 두고 있지만 이들 가운데 불상은 불탑에 비해 훨씬 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경주에는 한때 ꡐ절이 별처럼 퍼져 있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寺寺星張 塔塔雁行)` 장관을 이루었다는 말이 전한다. 석탑은 우선 그 재료면에서 비바람이나 불에 견디는 힘이 강하여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들이 많이 전하고, 돌을 다루는 솜씨와 재주가 뛰어나 오늘날에는 귀중
흐름을 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각 각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했던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강봉룡·서의식,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솔, 2002.
백월산白月山 동남쪽 3,000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륭사, 사천왕사, 법륜사 등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절의 건축원형을 찾아볼 수가 있다. 백제의 옛 땅에는 몇 개의 석탑만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부여 정림사 터의 5층석탑은 그 구조가 목조 건축의 양식으로 되어 있는 백제의 대표적인
Ⅰ.서론
문학은 시대와 역사, 사회적 환경의 산물로 한국의 역사와 더불어 공존해온 불교사상, 불교정신이 한국문학에 흡습되어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를 전후한 삼국시대이며, 내용상 남북조시대 이래 중국에서 변용된 인도 불교였다. 그
양식으로 공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그 중에서 과학적, 심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인 국보 제 24호 석굴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95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석굴암에
Ⅰ. 개요
문화재보존정책을 둘러싼 행정환경 변화는 크게 다음의 4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첫째는, 동산문화재와 출토문화재 중심의 点단위 문화재유산에서 보존구역, 천연기념물 등 面단위 문화재 행정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국민들의 생활수준과 의식수준이 향상되어
시대를 통하여 전승되어온 하나의 근본적인 힘으로써 후세에 문화창조를 규정하며, 예술상의 전통은 취미, 형식, 감정표현, 태도, 기법 등에 대한 일정한 지속적 특징을 가지고 민족의 예술정신을 일관시켜 민족의 양식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문양이란 명사로서, ‘무늬의 모양’이라고 해석된다.
(9) 16세기, 사찰범종양식의 부활
15세기 후반 한중 혼합양식이 출현한 이후 해인사 홍치 4년 명동종(1491)을 마지막으로 16세기 중엽까지 왕실과 사찰에서 일제히 범종 주성이 중단되었다. 이는 조선왕조 개국 이래 시행된 억불정책으로 16세기 중반까지 불사가 엄격히 통제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5
시대의 유례(遺例)로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및 안동(安東) 봉정사(鳳停寺)의 극락전(極樂殿) 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가람배치의 여러 양상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특성을 달리하면서 발전되었다. 그 중 탑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탑은 원래 산스크리트의 스투파(st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