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의 기원과 구조』, 서울:새문사, 1990
산대희 기원설은 일종의 가설무대인 산대(山臺) 위에서 베풀어진 놀이 즉 산대희(山臺戱)에서 산대극(山臺劇)이 생겨났고, 후에 산대극의 공연이 폐지됨에 따라 산대극의 연기자가 지방으로 흩어져 각 지방의 가면극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Ⅰ. 개요
탈춤은 우리나라의 민속문화 속에서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온 극양식이다. 모든 문화양식이 그러하듯 탈춤 역시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상황들의 반영물이다. 탈춤의 형성기를 조선 후기로 추정한다면 탈춤에는 조선 후기의 제도, 문화의 여러 모습들이 담겨 있다. 조선 중기부터 시작된 신분질
조선시대적인 민예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Ⅱ. 탈(가면)의 정의
우리말 탈은 광대, 초란이, 탈박, 탈바가지라고도 하고 한자의 표기로는 면(面), 면구(面具), 가변(假面), 대면(代面), 귀두(鬼頭), 가두(假頭), 가수(假首), 괴뢰(傀儡), 귀뢰(鬼儡) 등으로 뒤섞여 사용되었다.
놀이를 만드는 본디의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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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탈놀이(가면극, 탈춤)의 역사
탈놀이는 가면을 쓰고 연희를 행하는 가면극의 일종으로, 탈놀이와 함께 산대놀이, 오광대, 야유, 사자놀이, 별신굿 놀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의 가면극은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최
탈춤(한국전통탈춤)의 분류
오늘날까지 전해 온 탈춤은 지역적인 특성, 발생 계통, 그 내용이나 탈꾼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입장에서 분류해 볼 수 있다. 대체로 각 마을 단위의 현지 주민에 의해 자생적인 놀이로 된 것과 유랑 예인들의 놀이로 된 것, 이 둘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앞의 것을 두
탈로는 상례(喪禮)때 사용되던 방상시(方相氏)가면과, 정초에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비는 사자(獅子)가면이 있다. 한편 개성 덕물산(德物山) 위의 신당(神堂)과 영천군 신녕면의 무당 신막(神幕)에 안치되어 있던 광대시(廣大氏), 소미시, 놋도리 및 장군가면 등은 신의 존재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걸쳐 진행되어 왔을텐데, 과거에는 어떠한 형태의 흔적으로 남겨져 있을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한‧일간의 과거 문화의 비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수많은 전통문화 중 양국의 대표적인 민중의 예술인 탈춤과 가부키의 비교를 통해서 이 차이점을 밝혀내고자 노력하였다.
Ⅰ. 개요
민족 연극의 수립이라는 과제와 함께 195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전통극 운동은 60년대에 국가의 문화정책에 힘입어 활발하게 전개된다. 60년대의 전통극 운동은 독자적인 논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국가의 행사문화를 장식하는 민속예술의 하나로서 취급되었다. 이 점은 전통에 대한 60년대
산대극이 공의(公儀)로서 상연되는 일이 폐지되자, 산대도감에서 녹을 받던 연희자들이 해산하여 주로 민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점차 민중오락을 위한 민속극으로 정착하게 되면서 가능했다.
3. 가면극의 공연방식
1) 상연시기와 시간: 현전하는 탈놀이의 상연시기와 시간은 각 지
산대놀이, 경상도 지역에서는 야류(들놀이)와 오광대, 황해도 지역에서는 탈춤 등으로 명칭에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 내용이나 주제는 조선후기 사회 현실에 대한 민중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특히 승려나 양반, 남성의 권력에 대한 비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봉산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