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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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理)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어서 인심과 도심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은 다만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했는가,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 발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욕을 천리에 배치된다고 보는 기존의 천리인욕설과는 대비되며,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天理滅人慾)는 심성수양면을 강조하여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한다. 송대철학은 이정(二程)과 주자(朱子)의 철학을 가리켜 정주학(程朱學)이라 하고, 명대철학은 왕양명(王陽明)과 육상산(陸像山)의 철학을 가리켜 양명학(陽明學)이라 한다. 또한 양자를 비교하는 측면에서 전자를 리학(理學)이라고 하
天理)을 현세에 실현하는 주체는 왕이었다. 신하들은 왕이 받은 그러한 天命을 실현하는 데 모든 힘을 바치는 것이 도리요 충성이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신유학자들은 신유학의 폭넓은 사상 중 이러한 새로운 왕정관을 어느 면보다도 중요시 하였다. 새 왕조의 왕들은 먹는 것이 곧 백성의 하늘(植則
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
1. 연구목적
조선시대에는 정치와 교육 모두가 유학에 의한 이념에 의해 이루어졌고, 또한 이 시대의 성리학은 노(老), 불(佛)을 배척하면서 발흥하였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가 집대성한 것이어서 주자학이라고도 불리지만, 성명(性命)․의리(義理) 또는 천리(天理)․인성(人性)을
天理)를 구명하는 궁리(窮理)공부를 하였다. 주희는 모든 사물에는 겉, 속, 상세함, 거침이 있으며, 또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이(理)가 담겨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왕수인도 친구와 함께 뜰 앞에 있는 대나무를 마주보면서 깊이 탐구하였다. 그 친구는 3일 만에 쓰러지고, 그는 7일 만에
天理 등의 함의가 수용된 것이다. 셋째는 ‘윤리규범’으로서 인간관계에서 따라야 할 가치관을 의미하며 道理․天命 등의 의미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주목할 것은 자연철학적 개념으로서의 理이므로 위의 세 가지 의미 중 궁극적 근원과 자연법칙의 의미가 이에 해당한다. 그
天理滅人慾)는 심성수양면을 강조하여 성리학(性理學). 성리학은 성리의리지학(性理義理之學)의 준말
이라고도 한다.. [강좌 중국철학] P 209 참조
송대철학은 이정(二程)과 주자(朱子)의 철학을 가리켜 정주학(程朱學)이라 하고, 명대철학은 왕양명(王陽明)과 육상산(陸像山)의 철학을 가리켜 양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