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기술관료 출신인 정일룡, 김일성 유격대 일원이었던 박금철 등이 있다. 파벌이 존재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매우 단합된 형태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내각 수상이자 당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확고한 자신을 갖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경제복구와 당 재건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중요한 역할
홍명희, 정로식 정도였다.
1961년 9월 11~18일에는 제4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로동신문 사설은 『영광스러운 승리자들의 대회』로 규정하였고 김일성은 9월 11일 6시간 이상에 걸친 장문의 보고를 통해 생산관계의 사회주의 개조와 북반부 민주기지 공고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혁명의 승리를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제3~4장)
제3장 6.25전쟁과 전시체제(1950~1953)
1950년 6월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 ‘군사위원회조직에 관하여’를 채택하여 위원장 김일성 아래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전선사령과 김책, 민족보위상 최용건, 내무상 박일우, 국가계획위원장 정준
홍명희, 전선 사령관 김책, 민족보위상 최용건, 내무상 박일우, 국가계획위원장에 정준택 등 6인을 군사위원으로 선출한다. 군사위원회는 공화국 내각의 각 성 및 국을 비롯하여, 그 밖의 국가중앙기관과 각 도·시의 지방군 정부에 배속되었다. 군사위원회는 그 인적 구성에서 볼 때 전시행정과 군사 양
홍명희ㆍ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으며, 1909년에는 일어로 쓴 단편「사랑인가」를 발표하였다. 1910년 귀국하여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그 해 수원 백씨 백혜순과 중매 결혼하였다. 1917년《매일신보》에『무정』을 연재하였다. 1918년 백혜순과 이혼
홍명희, 남의 이문구'라 할 정도로 만연체와 구어체, 토속어와 서민들의 생활 언어가를 구수하게 구사하고 있다.
농촌을 소재로 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 『관촌수필』은 1950∼1970년대 산업화시기의 농촌을 묘사함으로써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현재의 황폐한 삶에 대비시켜 강하게 환기시켜
>, 이기영의 <두만강 ①,④> 등에 두루 나오는 것이다. 같은 월북 작가인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과 이태준의 <화관> 등 광복 이전의 작품에도 나왔던 이 말이 광복 후 남한의 작품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과 연변의 작품에 자주 보이는 이 '가난이 원수'라는 말이 왜 남한에서는 보이지 않을까?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에서 볼 수 있는 근대소설의 이야기적 흐름의 한 줄기에서 그의 이야기들은 문학사의 너른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것. 이야기가 그를 소설가로 만들었는지, 체험과 감정이 그를 소설가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 … 중 략 … ≫
Ⅱ. 소설가 이호철과 이데올로
홍명희 등과는 다르게 김사량은 그 출생부터 일제시대를 딛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일제시대 중에서 헌병경찰통치로 불리는 1기의 시대이다. 조선에 대해서 일본은 강압적인 정책을 취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통치체제를 모색해
>, 서정주의 <화사집>, 소설에 있어서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비롯 한설야의 <탑>, 이기영의 <고향>, 염상섭의 <삼대>, 김남천의 <대하>, 이태준의 <달밤>, <복덕방>, 박태원의 <천변풍경>, 등이 이동안에 이룩된 문학적 성과로 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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