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란?
七支刀…좌우 세개 위로 한 개 총 일곱개의 가지를 가진 길이 74cm의 창모양 철제 칼
날의 앞 뒤에는 금으로 상감한 명문 총 61자가 새겨짐
백제의 왕세자가 일본에 준것으로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에 보관되어 있음
왜와 삼국(특히 백제)의 관계, 임나일본부와 관련하여
1. 칠지도의 발견
칠지도는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백제와 왜국 사이에 맺고 있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칠지도는 길이 약 74센티미터의 대형 창 모양 철기로, 날 양쪽에 가지가 세 개씩 어긋나게 솟아 있고, 그 날 앞뒤 넓적한 면에 금으로 상감한 명문 총 61자가 새겨져 있다.
칠지도는 아래에서1/3 지점이 부러져있고 연마 작업 중에 일부 글자가 훼손되어
오늘날 일부 글자들을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완전하지 않은 명문을 해석하는데 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특히나 그 공개과정에 있어서 일본 사학자 들과 이소노카미 신궁 측의 미심쩍은 태도 때문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권익에만 치중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뚜렷이 말해주고 있는 역사를 왜곡하려 함은 물론 역사적으로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있는 것 처럼 과장해서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올바르지 않은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임나일
3. 일본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1) 일본서기 (‘日本’이라는 명칭사용에 대해)
<일본서기> 에서는 왜(倭)가 5세기 경 가야 땅에 직할 식민지인 ‘임나일본부’ 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황당무계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일본 사학자들조차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해 오고 있는
Ⅱ. 6·7세기 百濟와 日本의 關係
6세기는 한국 내 정세의 전환의 세기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고구려-신라의 연합과 이에 대립되는 백제-가락이라는 관계는 이미 지난 세기 중엽부터 파괴되고 고구려에 대립되는 신라, 백제의 접근이라는 형세로서 내려오다가 6세기의 중엽부터는 다시 이 관계가
Ⅰ 서론.
최근 일본의 독도가 자신이 땅이라 우기기에 반대하여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광고를 하는 등 여전히 독도를 둘러싸고 분쟁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 왜곡은 비단 독도 문제 한 가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자국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종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고대 한반
1400년의 침묵을 깨고 비석하나가 새롭게 발견됐다.
그것은 바로 광개토대왕비였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문과 일본서기를 근거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 간 고대 일본이 고대 한국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한일 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의 시작이었다.
광대토대왕비 재발견
Ⅰ. 서론
‘금석문’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소극적 어의는 금속질이나 석질 재료의 바탕위에 주조 혹은 서각한 문자 자료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 어의가 함축하고 있는 뜻으로부터 목제나 토제 문자 자료까지를 포함하는 적극적 개념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원래 금석문이
4) 송서(宋書)
중국 남북조시대 남송(420~479)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에는 5세기에 남송에 조공을 바친 왜의 5왕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무왕(武王)이 스스로 왜․백제․신라․임나․가라(가야)․진한․모한 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