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을 앞세우고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이하응은 1843년(헌종9) 흥선군에 봉해졌다.
강화도조약 때에는 개항불가론을 폈다. 또한 내부적으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으로 일본세력과 개화반대 등을 주장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반침략적 민족의식으로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이러한 의병운동은 농민운동과 위정척사사상의 영향을
4) 내재적 발전론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이 얼마든지 자력으로 근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할 당시 조선을 점령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는 청,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이었다. 그런데 청은 쇠퇴하고 자국마저 큰
한국의 근대화]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은 사건중심으로 보았을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 독립협회의 활동, 애국 계몽 운동, 대한제국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웃나라 일본이 근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될 시기에 흥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의
임오군란 이후 다시 집권한 민씨 躑躅은 특별한 정견도 없이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급구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自主獨立이 크게 침해되고 있었다. 반면 청은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킨 상태에서 민씨 정권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