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人, 北人 등에 대한 대대적인 등용을 시행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존 세력들과의 균형을 이루고 자신의 정치를 펼쳐 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⑵ 대외적 배경
19세기 전반 근대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 서구사회의 열강(列强)은 상품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이다.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하였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남인끼리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
南人이지만 僻派로서 時派를 공격하는 중요한 도구로 천주교를 이용하였다. 즉 분주폐제가 정치적 문제로 부상한 것이었다. 射手 역할은 洪樂安이 담당하였다. 그는 곧바로 좌의정이었던 남인의 거두 蔡濟恭에게 장문의 글을 보냈다.
“閤下께서는 오늘 진산의 양적의 일을 어떤 변괴라고 보십니까?
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南人) 중심의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일명 '경세치용학파 經世致用學派'라 지칭하고, 지배계층인 노론계열의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기술의 발전 등 물질문화의 발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용후생학파 利用厚生學派'라
풍부한 정수리는 주로 적자가 탄생한다.
南人更宜頭額看, 北人當向地閣參,其大略推斷無差。
남인갱의두액간 북인당향지각참 기대략추단무차.
중국의 남쪽 인간은 다시 머리와 이마를 봄이 마땅하며, 중국의 북쪽 사람을 봄에는 지각을 향해 참고해야 하니 대략 추측하여 판단하면 착오가 없다
조선 왕실의 계보와 당파 싸움에 대해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조선 중기의 관료는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북인(北人)등의 네 당파로 갈려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계기로 번갈아 가며 권력을 잡았고, 그 때마다 왕명(王名)으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南人)이 정치적 세력을 잃게 되는 시기를 만나자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초야로 물러날 마음을 굳히고, 서울을 떠나서 동쪽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소내 북쪽 강가의 마재 땅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에 초가 몇 칸을 세워 임청정(臨淸亭)이라 이름 지었으며, 임청정의 동쪽과 서쪽에 세 아들이 살
南人)이 정치적 세력을 잃게 되는 시기를 만나자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초야로 물러날 마음을 굳히고, 서울을 떠나서 동쪽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소내 북쪽 강가의 마재 땅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에 초가 몇 칸을 세워 임청정(臨淸亭)이라 이름 지었으며, 임청정의 동쪽과 서쪽에 세 아들이 살
南人·北人·大北·小北과 같은 당파를 일으켜 정치의 부패, 국력의 약화, 계급적 차별 등 國利民福을 도외시하는 사회현상을 유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당쟁의 근원은 宣祖 8년(1579) 척신 심의겸과 신진사대부 김효원 사이의 전랑 추천 문제에서 발생되었다. 전랑으로 추천된 김효원을 심의겸의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