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人을 중심으로』, (서울: 혜안, 2004), 31-36.) 그러나 정철은 세자건저 문제로 다시 역공을 맞았다. 이 때 서인에 대한 동인의 숙청 정도를 놓고 동인이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온건파는 남인으로, 강경파는 북인이 되었다. (남경태, 『종횡무진 한국사 - 하』, (서울: 그린비, 2001), 142)
대체로 남인은 이황에
南人;옛 남송치하의 주민) 등 4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이 중에서 몽골인만이 정치적인 요직을 독점해 모든 특권을 향유했으며, 색목인은 몽골인의 능숙하지 못한 재정 등을 담당함으로써 역시 지배자의 반열에 끼어들었다. 수적으로는 월등히 많은 한인과 남인(南人)이 피지배자의 자리에 떨어져 정치
南人과 北人으로, 西人은 肅宗 초반에 老論과 小論으로 나뉘었다.
. 氣에 대한 理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氣의 영향을 받지 않는 理로 理의 우위론을 내세운 영남의 退溪學派(李滉과 이황을 추종하는 학파의 총칭)와 氣의 영향력을 주목하여 理를 실현하기 위하여 氣를 고려하여 氣를 效果的으로 統制할
南人 경기 충청지역일대 기반으로한 남인세력. 주로 기호학파라고 불리우며 이이(李珥)의 성리학설(性理學說)을 계승한 일단의 학자들을 말한다. 이들이 주로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에 살았기 때문에 이황(李滉) 및 그의 문인들과 구별하여 기호학파라 하였다.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김창협(金
南人)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命) ·이건명(李健命
南人으로서 중소지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가문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이후 노론 세력에 의해 정치계에서 물러나 오랜 휴지기를 거치고서 정조 연간의 탕평책蕩平策에 힘입어 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초창기 서학에 접근했던 인물들 가운데 양반 출신 신도들은 서학에
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南人)으로 남송 통치 지역이었던 장강유역과 그 이남지역의 남송유민들을 4등급으로 편입시켰다.
1,2등급에 속하는 몽고인과 색목인은 지배층에 속했고 3,4등급에 속한 한인과 남인은 피지배계층으로 속해 있었다. 인구 구성은 몽골인과 색목인이 전체인구의 3%에 해당하는 백만명정도였고 나머지 87%는
南人:南宋 치하의 주민) 이외의 서방계 각국 사람을 가리킨다.) 이라는 설이 있듯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렇듯 게임에서도 보여주는 중국의 모습이 이 책에서 나온 중국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로웠을 뿐 아니라 책에서 언급되는 것들이 게임에 철저히 반영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