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새 교과서 검정통과의 의미는 매우 심각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번 검정통과로 말미암아 새 교과서의 내용을 관통하고 있는 황국사관에 입각한 자국 중심주의적 역사인식이 일본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새 교과서는 전반적으로 보아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교류와 동서양
1. 역사적 작용과 의의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동방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해양을 이용하는 추세였지만, 그 이전에는 내륙의 길과, 그 통로를 이용하는 대상(隊商) 무역이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다. 바닷길을 통한 무역은 페르시아만(灣)으로부터 인도의 남해안과,
백제와 신라에 까지 전파가 되었는데 남방에 있는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보다 고분벽화가 많이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출토된 고분벽화의 종류도 많지 않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고분벽화가 출토 지는 주로 옛날 고구려 영역이었던 압록강유역(초기 고구려 도읍이 있는 국내성 지대), 대동강유
Ⅰ. 삼국시대 한∙일 음식문화교류
<술과 누룩>
[고사기]
"술의 양조에 관해서는 오진 천황 시대, 백제에서 니호, 다른 이름으로 스스코리(須須許理)라는 사람들이 일본으로 와서 좋은 술을 제조해서 헌상했다. 천황은 이 술에 취해 기분이 매우 좋아서, '스스코리가 빚은 향기로운 술에 이 몸이
조공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총 3회로 백제 전지왕 5년인 409년에는 왜국의 사신이 야명주를 보냈으며, 14년인 418년에는 사신을 왜국으로 보내 백면 10필을 보냈다. 하지만 신라 경덕왕 원년인 742년에는 일본국 사신이 조공하였으나 받지 않고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왕 부여 풍으로 부르는 등 일본서기는 백제 부흥군에 의한 백제 부흥국을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백제 부흥국에 대해서 삼국사기와는 다른 일본서기의 인식은 백제와 왜 간에 전통적으로 긴밀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백제 부
백제국 세력ㆍ稷山(직산)의 목지국 세력ㆍ익산의 건마국 세력ㆍ영산강 유역의 新彌국세력 등은 지역연맹체를 형성한 중심세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직산의 목지국 세력은 이러한 지역 연맹체를 형성한 세력 중에서도 가장 우세한 세력으로서 많은 추종소국을 거느린 세력이었고 그 기반위에서
왜) 가 모두 이를 얻어간다”는 내용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리고 김해 池内洞(지내동) 옹관묘에 부장된 袋狀口綠土器(대상구록토기), 김해 부원동 패총에서 나온 二段口綠形土器(이단구록형토기) 등도 김해지역과 왜와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양 지역에 소국가가 분립된 상태에서 이루
(2) 100년에 걸친 몽골공주와의 결혼
고려25대 임금 충렬왕부터 31대 임금 공민왕까지 약 100년간 고려의 왕들은 모두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동안 5명의 고려왕이 8명의 몽골여인과 결혼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이 몽골에 인질로 잡혀가 몽골 공주와 결혼한 고려왕들이다. 왜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