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김억(金億)
1. 작가의 생애와 문학 활동
호는 안서(岸曙), 본명 희권(熙權). 1896년 11월 30일 평북 정주 곽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교를 거쳐 1913년 일본 게이오 의숙 문과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중퇴했다. 귀국 후 오산중학교 및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동아일보·매일
본명 정식(廷湜). 평북 구성(龜城) 출생.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
김억의 시문학사적 기여도
① 근대시의 영역 확대 → 초기에 <태서문예신보>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서구시를 번역해서 소개하는 한편, 프랑스 상징시의 기법을 도입하여 우리 근대시의 영역을 넓힘.
② 민요적 서정시의 활로 개척 →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우리의 민요 및 한시에 대한 관심을 지니면
김억의 비평
(4)양건식의 비평
3. 1910년대 문학비평의 의의
Ⅶ. 결론
Ⅰ. 서론
1894년 갑오경장이란 대변혁이 일어남과 때를 같이 해서 서양의 근대화에 발맞추기 위한 민족적 자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개국기원을 사용할 것, 각국에 전권 공사를 특파할 것, 문벌양반상민의 계급을 타파
五山學校 1907년 이승훈(李昇薰)이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오산리(五山里)에 창립한 민족
운동 인재양성기관. 10년 일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교육취지를 기독교정신으로 바꾸었지
만, 그 성격은 사관학교·훈련원·정치학교·인문중학교·특수모범자양성소 등을 겸한 학교였다.
그리하여 소정의 교과
18. 떠나가는 배
떠나가는 배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
2. 김영랑의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1) 작가소개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의 본명은 윤식(允植), 호는 영랑(永郞)이다. 전남 강진 대지주(大地主)의 장남으로 출생한 영랑은 14세(1916) 나던 해 상경하여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이듬해 휘문의숙(徽文義塾, 지금의 휘문중고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1920
① 《독립신문》 제 3호의 ‘허울 슌쳥골 최돈셩’의 글은 표제없이 작자의 주소와 이름만을 밝혀 ‘외국통신’란에 발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밝혀진 이러한 유형의 최초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립신문》의 다른 「애국가」나「독립가」및 기타 등과 마찬가지로 자주독립과 개
당시 문학인들은 이런 과학적 실용사상에 힘입어 새로운 문학작품 형성에 자연적으로 가담하게 됨으로써 이 시기의 문학적 근대화를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홍범(洪範) 14조에서 신교육을 천명하고 교육을 전담하는 학부아문(學府衙門)을 둠
한성사범대학에서는 교사를 양성하고 전국 각지에 관공
제2장 근대문예사조의 등장 - 소장파가 일으킨《창조》문학
1. 문예지와 순문학운동
신문학사 위에 언제부터 근대 문예사조가 등장했는지 물으면 그것이 좀 더 뚜렷한 모양으로서 사조적인 주류가 된 것은 1920년대라고 할 것이지만, 그것이 처음 선을 보이면서 등장한 것은 그것에 앞서서 19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