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키극 <단풍구경> 촬영, 기록영화의 형태
일본 영화는 초기에 게이샤의 안무, 가부키배우의 공연모습, 신파극의 무대를 찍으며 실사위주의 촬영에서 극영화 제작의 토대를 구축해 가며 1910년대까지 연극적 재현에 머물게 된다. 이는 일본의 뿌리깊은 전통예술인 가부키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다.
신파극이라는 평도 받기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다른 만화 장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부분을 순정만화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좋게 평가할 수도 있다.
순정만화를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은 여성들이다. 인물들을 화려하게 묘사하거나 여성 작가들이 여성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이상적
신파극에서 부터 시작되며 1920년대에도 대중들이 열광한 통속소설들이 있었다. 아래에서는 방인근과 최독견의 작품을 가지고 1920년대 통속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최독견의「僧房悲曲」(<조선일보>, 1927.5.10~9.11)은 얼핏 사랑의 사각지대로 인식되는 승방(僧房)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두 청춘
신파극을 지양하고, 조선에 근대극 수립과 함께 연극의 대중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중심에 놓인 것이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이후 약칭-극연)’ ‘극예술연구회’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극연 1기는 주로 홍해성이 연출을 담당한 1932년 5월부터 1934년 12월까지를 말한다. 1기의 중심은
신파극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출발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극이 촬영을 제외한 모든 작업이 순수한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완전히 한국영화를 만드는 기초적인 작업을 완수했음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후 20년으로 들어
신파극, 1930년대와 1950년대를 풍미했던 신문소설을 거치며 1950년대 후반 이후 형성된 장르 영화에서 명실 공히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멜로드라마였다.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도 가장 끈질기게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멜로드라마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2. 멜로드라마란?
현
신파극에 두고 있으리라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멜로영화는 특히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고무신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60~70년대 호황을 누렸고 많은 여성들이 극장에서 멜로 영화의 주인공들과 함께 웃고 우는 가운데 위안을 받았지만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영화퇴조와 맞물려 주
신파극과 구별되는 리얼리즘극을 발표하였으나 극의 구조적 취약성, 두드러진 감상성, 인물 창조의 미흡 등의 이유로 본격적인 리얼리즘 극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유치진이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라고 불리는 이유는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극작과 연출, 연극론 등을 통해 투철한 리
처음 이 책을 접한 것이 아마도 02년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가 내가 처음 군대에서 보내는 겨울이었으니 좀 어수선했던 것이 사실이리라. 알 수 없는 만감과 희비가 교차하는 사이에서 이 책을 읽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로맨틱한 제목에 신파극조의 연애소설은 아니더라도 그런 류일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