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之光≫과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발행한 《靑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學之光≫을 보면 당시 지식인에게 實力養成論의 思考가 널리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국내외에서 비판적 신지식층들은 현실을 보는 비판적 眼目을 확산시켰으며, 작게나마 식민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學之光)》, 《조선문예 (朝鮮文藝)》 ,《태서문예신보 (泰西文藝新報)》, 《삼광 (三光)》 ,《창조 (創造)》 등의 문예지가 주종을 이루었고, 그 밖에 종합지로서 《청춘 (靑春)》 ,《공도 (公道)》 ,《근대사조 (近代思潮)》 등이 있었 으나, 본격적인 종합 지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것들이었다. 이와 같이
學之光』 3호에 실렸다. 이밖에도 전생애를 통하여 소설, 수필, 희곡 등 발표한다.
1910년대 일본에서는 여성해방과 신여성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또 나혜석은 먼저 일본에 유학중인 素月 崔承九를 알게 되어 그와 연애를 하면서 영향을 받았다. 최승구는 자유주의자였으며 학지광의 편집인
學之光>을 통해 이광수가 희곡 『閨恨』을, 윤백남이 1918년 12월 '태서문예신보'에 『國境』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희곡이 문학으로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20년대부터 희곡이 문학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신연극의 발판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희곡문학의 특징
안서 김억
Ⅰ 작가의 생애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