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이론적 탐구형태를 취하여 전개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론 탐구의 중심인물은 이황과 이이였으며 그들의 주된 탐구 내용은 우주생성에 관한 태극론(太極論)과 인간내면에 관한 심성론(心性論)을 이기론적(理氣論的)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생애와 저작
율곡의 성(姓)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珥), 자(字)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아버지는 원수(元秀),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율곡은 7남매 중 다섯째(위로 형 2, 누나 2)로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어린 시
論大王大妃服制]가 영남유림들의 요청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갈암이 율곡의 학문을 비판한 [栗谷李氏論四端七情之辨]은 어떠한 배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 현상적으로 볼 때 [율곡이씨논사단칠정지변]이 경신환국을 통해 서인에 의해 남인이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면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며, 다른 하나는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면서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 이다. 이 두 학자의 뒤를
사칠논쟁의 학문적 의의
퇴계와 고봉이 주고 받았던 사칠논쟁은 학문적 진지성과 자신의 심성론적 논거를 규명하는 분석의 치밀함에서 한국유학사의 학문적 논쟁에 모범이 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인간을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규정한 맹자가 있고, 그 반대라고 주장한 순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