頌德碑)를 도끼로 때려 부순다. 훈은 사촌 동생 혁을 통해 오작녀와 월남 계획을 세운다. 그는 순안으로 돌아오다가 도섭 영감이 주도했던 지난 농민대회 때 숙청당한 삼촌 박용제를 본다. 사동 탄광에 끌려 갔다가 탈출한 용제 영감은 트럭에서 몸을 날려 자살한 것이다. 오작녀와 순안을 떠나려고 했
예이다. 석문의 예는 무수히 많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 우산하고분군에 자리 잡고 있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로부터 시작해서, 죽은 이의 신원과 행적을 기록한 고려의 각종 묘지(墓誌), 조선 지방관들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같은 부류를 들 수 있다.
頌德碑) 같은 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금석문이라 하면, 위와 같은 금문, 석문뿐 아니라 토기에 기록한 토기 명문(銘文), 잘 다듬은 나무 조각에 쓴 목간(木簡)의 기록,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씨로 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나 전돌의 명문(銘文
頌德碑)를 세웠다.
의병활동과 미관말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남아(男兒)의 대사업은 문장임”를 깨닫고 공맹(孔孟)의 제서(諸書)와 주자의 부주(附注)에 잠심하여 침식을 잊으며 깊은 밤에는 묵상(想)으로 천고의 성현(聖賢)을 생각하였고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 성(誠) 경(敬) 충(忠) 효(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