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정복에 의해 고용이 증대하며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또 높은 인구밀도가 완화될 수 있다는 ‘사회적 제국주의자’의 주장은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대 내지 단순한 선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치가들은 제국에 대한 호소가 갖는 매력과 이것이 가
관계사를 미래 지향적인 협력관계로 전환시키는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한일관계의 이러한 국면전환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대일 대중문화 개방을 포함한 과감한 선제적 대일 포용정책에 의해 가능했던 만큼, 이번 교과서 파동의 재현은 `밀월 속에 싹튼 일본 측의 배반`으로 인식되는 것
정도의 개괄적인 보도기사만 나왔을 뿐이며 극히 일부의 연구자와 학회에 의해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는 2001년도 2월 말경 검정통과가 확실해지면서부터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가해행
전쟁 전야에 이를 때까지 힘의 결합을 통하여 확대재생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추진하였고(1902년), 여기에 미국이 ‘비공식 회원국’으로 가세하였다. 러시아도 영일동맹에 대항하기 위하여 노불동맹을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확대적용하려는 전략으로 대응한다. 이 같은 대립
국제법에 따른 최초의 근대적인 협약은 운요호(雲楊號)사건으로 말미암아 체결된 1876년의 朝․日조약(강화도조약)으로, 이는 단순히 국가간에 체결된 협약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동안 쇄국일변도였던 조선이 최초의 개항을 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를 필두로 1882년 朝․美조약(朝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