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추구하는 깨우침의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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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불교선(禪)과 화엄선과 화엄의 갈등관계를 화엄의 敎判論, 특히 頓敎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즉 지엄이 시도하고, 法藏이 체계화한 五敎判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비판한 혜원과 다시 혜원을 비판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영
선이라 할 것이다. 즉 사상선은 선과 일을 둘로 보지않고 일 속에서 선을 잘하고, 선으로써 일을 잘하는 것이 그 특성이기도 하다. 무시선의 사상선적 성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일(사)의 의미를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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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불교선(禪)과 선종
선의 원래 명칭은 ‘禪
선정은 지혜의 본체(本體)요 지혜는 선정의 작용(作用)이니, 지혜가 있으면 곧 그곳에 선정이 있고 선정이 있으면 곧 그곳에 지혜가 있다. 선지식아! 이 뜻은 곧 선정과 지혜가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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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불교선(禪)과 화엄선과 화엄의 갈등관계를 화엄의 敎判論, 특히 頓敎를
위빠사나선이 이상으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불안이나 공포, 고뇌,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이 위빠사나선이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선과 정신건강을 함께 논할 수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체적으로 정신건강의 중심
불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눌에 의해 그 가닥이 제대로 잡혀졌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지눌 사상의 골간인 돈오점수를 선문(禪門)에서 역기능을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과 이론의 대결이라는 성격을 넘어 전승된 한국 불교가 바로 되었는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