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cht. 이상면 역. 한길사. 1999. p.15
물론 여타 진보적 작가들 중에도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은 많다. 하지만 브레히트처럼 부르주아라는 자신의 출신계급의 경제적 부와 사회적 권력뿐만 아니라 문화적 코드까지도 철저히 부정한 작가는 흔치 않다. 특히 브레히트와 여러 가지 예술적 논쟁을
동시에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 언제나 남녀 친구들을 - 가장 중요하기로는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1924년부터 브레히트가 죽을 때까지)과 마가레테 스테핀 (1932년부터 1941년 요절할 때까지)을 - 직접적인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이것 또한 문학과 사회의 변화된 관계에 대한 통찰에서 이루어졌다.
형식으로서의 폭력, 그리고 연극적인 거짓된 태도는 어린 뮐러의 첫 번째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다고 훗날 그는 말하고 있다. 라인하르트 찹케(2001), 『하이너 뮐러 평전』, 정민영 역, 연극과 인간, pp.14~15
이후 그는 “범죄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모두가 기피하는 속에서 고립과 고독의 유년
사회적 ․ 도덕적 목적을 되찾는 것이었다. 무대는 우선 넓은 의미의 정치적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연극이 사실을 다루는 과학 실험실이어야 하며 그 사실은 객관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레히트는 피스카토르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하면서 그를 “연
브레히트는 표현주의 논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루카치와 공식적으로 논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표현주의 논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
- 이들의 논쟁의 주된 쟁점은 리얼리즘의 구현 방식이었다.
- 브레히트는 리얼리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기술, 리얼리즘에 대한 체계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