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론인 존주론은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 이에 따라 현실론적 의식을 앞세운 소론은 눈앞의 위협적 존재인 청나라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멸망한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자는 노론계의 주장과 거리감이 있었다. 그러나 소론도 중화문화 수호 논리인 존주론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병자
의리론적 인식을 우암과 주자에서 찾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화서가 호락논쟁의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은 화서학파의 형이상학이 기호학파의 분파적 배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종합하고 지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서 이항로의 철학 사상
Ⅰ. 조광조의 생애
조광조는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4세때 부친이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자 임지에 따라가 그곳에서 몇 해를 지냈는데 17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굉필이 그곳으로 유배를 옴으로써 일찍이 김굉필로부터 학문하는 방법을 배웠다.
조선 후기 대명의리론의 전개~ 북학론의 전개
대명 의리론의 배경
안정된 농경사회 기반 위에 성리학적 이념을 추구한 조선은 16세기 신 구 정치세력 교체기에 즈음하여 1592년부터 7년간 일본과의 전쟁(임진왜란)을 겪음. 사림출신 관료들의 대명외교의 성과에 힘입은 조.명 연합군의 활동과 지방 사림
1. 머릿말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 복위사건 이후 이성계일파는 정몽주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신진유학세력인 이들은 공양왕 옹립이후 유교 중심의 개혁을 실시하며 신흥세력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신진세력 가운데도 남은(南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