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례군 천곡이라는 마을 성태영에게로 보냈다. 그는 다시 유완무 집으로 갔다. 그리고 나흘 만에 해주에 고 선생을 만났다. 1902년 그는 약혼자를 구하려고 하였다. 어느 날 처녀가 와서 1년 동안 공부 할 수 있다고 하여 그는 그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3년 약혼녀네 집 낭자의 병세가 위중하고 약과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
4子를 두셨다고 전한다.단군 왕검께서 돌아가시자 만백성은 부모님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모여 앉아 경배하여 항상 생각하여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역대의 단군은 환인천제, 환웅천황과 초대 단군성조를 삼성사에 모셔 숭배지례(崇拜之禮)가 영세불체(永世不替)하였다.
却說昭義節度使劉悟, 因不肯移節, 仍守原鎭。
각설소의절도사유오 인불긍이절 잉수원진
移? [y?ji?] 지방의 고위 관리(官吏)의 전임(轉任)
각설하고 소의절도사인 유오는 절도사를 옮기려고 하지 않아 여전히 원진을 지키고 있었다.
監軍劉承偕, 在宮時得寵太后, 視爲養子, 旣爲昭義監軍, 恃恩傲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