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참된 유학자들은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이는 것을 경계하고, 재물이나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린 정의롭고 청빈한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풍은 화려하고 감각적인 채색화보다 담백한 수묵화를 유행하게 했고, 소박하고 정적
조선의 회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유의 가치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성정론과 천기론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지배해온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론이다. 그러다가 17세기 조선 중기에 오면 허목과 같은 지화문사에 의해 비로소 철학과 문하 용어인 성정
미술은 이렇듯 국초이래 여러 왕의 정책과 그 당시의 사회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배경과 여러 가지 상황에서 조선시대의 불교적인 조형미술은 위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특히 미술사에 있어서 전후기로 크게 나뉜다. 국초에는 그
조선 후기 예술사의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이다. 당대의 사람들도 공재를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했고, 추사 김정희는 공재를 선구자적인 위치에서 옛 그림을 배우려고 하면 마땅히 공재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내옥,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사 - 한국의 미술가』, (주) 사회평론, 2006, p.95
고
미술 유산 가운데 무엇보다 석굴암을 빼놓을 수 없다. 석굴암은 인도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마침내 한국에 이른 오랜 석굴사원 전통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의 사원건축은 삼국시대에 중국의 영향 아래 기초가 확립되었고, 당의 건축을 모델로 발전하여 거대한 모뉴멘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