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일본에 병탄되기 직전에 조선에서는 이미 근대교육을 수행하기 위한 제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언하면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하더라도 자주적인 민족교육의 확충이 뒤따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제시대의 교육 실태는 어떠했을까. 조선
교육령기에서 2차 교육령기 때 중등실업교육의 팽창이 누적되어 3차 교육령기에는 1차 교육령기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학교수가 증설된다. 특히 이전과 달리 공업학교 또한 증설되며 학교 증설과 맞물려 실업교육을 받는 학생수도 눈에 띄게 증가한다.
1943년 태평양전쟁 중 일제는 4차 교육령을
학생들의 동요로 말미암아 관리 및 운영 측면을 중시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등의 일이 있었다.
한편 한국인 학생들의 문제의식은 일제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① 당시 학생들은 일진회 소속 학생들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표출했다. 처음에 학생 기숙사는 일진회 회원 학생들을 여러
학생의 삼분지 일은 조선인 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분법적 잣대를 적용할 경우 이들을 매국노로 매도할 수 있다. 사회진화론이 만연해 있던 당대 상황에서 고등교육은 시대적 요청이었고, 경성제대는 한국에서 고등교육의 정점인 대학교육을 배울 수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성을 배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