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최한기의 생애
1.1 어린시절
순조즉위 이후 세도정치가 움트던 1803년에 최한기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최한기의 생부는 최치현이고 생모는 한경리의 딸이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큰 집 종숙부 최광현의 양자로 들어간다. 양부 최광현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넉넉한 가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가
사상가에 비교하면서, 그들에 못지않은 민권사상가라고 평가하였다. 김용걸, 「조선후기 실학사상에 대한 회고와 전망」,『동양철학연구 19』, 동양철학연구회, 1998
한편, 한말의 각 신문에서도 다산에 관하여 소개하였다. <황성신문>은 1899년 4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다산의 경제사상을 단편적으로
새로운 기풍이었다. 그러나 고증학을 위한 방대한 문헌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며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은 현실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고증학적 방법은 실학파에게 우리자신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문헌에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데 자극을 주었고, 국학연구의 업적을 가능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조선후기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제1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들어선 것은 동아시아 세 나라가 함께 겪은 변화였다. 일본의 덕천막부와 중국의 청나라와 달리 중세후기의 이상을 버리지 못한 조선왕조는 사회통제 능력을 상실하고 모순이
우리 민족문화의 독립성 내지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에 한국사를 시험과목으로 부과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었다. 따라 서 집권층 사대부의 모화사상과 존주대의론에 심한 반발을 보였으며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각과 긍지를 분명히 하였다. 또 실학의 민족적 성격은 당시 서양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