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이유는 서구의 문학적인 조류에 대한 무질서한 모방운동으로 생각 할 수 있으며, 문학사조의 동시 다발적 생성은 우리나라 문학의 특수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상의 시대상황을 참고하여 아래에서는 박영희의 문학관의 전향과정과 박영희가 한국문학사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논하겠다.
.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포된 신흥사회과학에 빠져든 다음 특히 계급주의를 지향한 『씨뿌리는 사람』을 탐닉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정신적인 동조자를 찾아 나서서 먼저 배재고보의 동창생인 박영희, 이상화, 안석주 및 상기 네 사람을 더 가담시켜서 구성원들의 이름 두문자를 딴 PASKYULA를 발족시
전향하였다. 그리고 일본 동경에서 「이인(二人)」이라는 시동인지를 발간하여 민요풍의 서정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일본어판 처녀시집 『모친송(母親頌)』과 『수유근지가(垂乳根之歌)』와 한시일역(漢詩日譯)인 『설백집(雪白集)』 등을 출간했다.
노천명(1912~1957): 황해도 장연출생으
문학사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만 일군(一群)의 시인들의 작품 중에는, 당시의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헤쳐 나갔던 치열한 삶의 행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들 작품들을 너그럽게 읽으면서 우리의 문학 유산을 더욱 풍요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