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개의 단계마다 우리의 지성들은 중국과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유학논리를 수용하였음이 통일신라에서 고려왕조로의 교체기에서도 소위 숙위학생들에 의해서 달성되었으며 고려왕조에 와서도 적극적인 문헌과 인물들의 교류를 통하여 왕실과 호족, 귀족 간에 갈등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다.
Ⅰ. 신라시대(신라)의 유학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늦은 신라도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여 가장 불교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를 이루었으나, 통일을 전후한 무렵에 오면 유교적인 정치 이념과 제도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신라가 팽창하여 넓은 영토와 많은 주민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유학을 수용하였으며, 4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유학 교육기관을 완비하였다. 근초고왕 29년(375년)에는 고흥이 박사가 되었다. 또 유학박사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였다. 무령왕 때에는 오경박사라는 관직이 설치되었다. 신라에서는 6세기부터 유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보급하기 시작했
Ⅰ. 유학사상의 의미
유학은 한마디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儒字는 人(사람인)과 需(구할 수)의 합자로 되어있어 인간사회에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뜻이 풀이된다. 인간을 중시하고 인간에 바탕한 인간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기독교와 비
신라인들의 삶과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해 보도록 하겠다.
2. 신라인들의 중국 여행
신라와 중국을 오갔던 사람들은 주로 공식사절단들과 불교와 유교를 공부하기 위한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사들이기 위한 무역 상인들도 중국에 주로 오간 사람들 중 한 무리였다. 신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