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포에서 보더라도 그의 정치사상은 부패한 봉건체제를 유지하려는 대책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건설을 지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향리세습제를 폐지하고 인재본위로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통색의에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모든 인재를 버리고 ꡒ서민을 버리고 증인을
2. 정약용의 업적
1) 경세유표(經世遺表)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 토지제도 ·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책이다. 44권 15책으로 되어있으며 필사본(필사연기 미상)이다. 원제명은《방례초본 邦禮草本》이며, 1817년(순
경세유표』, 『흠흠신서』가 있다. 이들은 농촌문제의 해결을 지주층 중심이 아닌 토지의 경작자인 농민을 중심으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자영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2.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중상(重商)적 입장.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상공업
경세유표>와 지방행정에 관한 개혁을 주장한 <목민심서> 그리고 형정에 대한 견해를 밝힌 <흠흠신서> 등이 유명하다.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기에 걸친 반계, 성호, 다산 그리고 서유구(풍석) 등의 새로운 농업개혁론의 주축은 재래의 지주·전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토지 소유와 농업경영을 제기한
경세학)
시부(時賦) 위주 사장지학의 문제점
중국 중심 화이관을 기반으로 한 주자학에 배타적으로 집착
현실과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춤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세상을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不愛
저작목적은 “현행의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보자”(因今之法而牧吾民也)라고 하여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지 못한다면 공직자들이 마음과 몸을 제대로 수양하여 청렴한 생활을 하면 세상이 바르게 되고 백성들이 숨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실제 행정에서 백성을 위하는 정
서론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에 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이다”라고 했다. ‘목민’이란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관자(管子) 제1편 「목민」에 서 유래했다. 목민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목민(牧 民)에서 목(牧)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일명 '경세치용학파 經世致用學派'라 지칭하고, 지배계층인 노론계열의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기술의 발전 등 물질문화의 발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용후생학파 利用厚生學派'라 지칭하기도 한다.
「허생전」
조선 후기 정조 때 실학자 박지원의 한문 단편 소설로 『열하일기』<옥갑야화(玉匣夜話)>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행동의 양과 범위가 크고 넓으며, 외국과 교역하여야 하고 나라 안에는 수레가 다녀야 한다는 작가의 실학적 경륜을 볼 수 있으며, 또 그의 다른 소설과 달리 북벌론자
정조의 총애가 시작되다
22세(癸卯年,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다. 여기서 다산은 10년 연상인 33세의 정조를 처음 만난다. 정조가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李檗)은 퇴계 이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