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역사적 개관
남한산성(南漢山城), 그리고 그 역사
한반도의 허리부분을 흐르는 큰 강인 한강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왔다. 역사에서 한강을 중심으로 이곳을 점령한 나라는 번성하였고, 빼앗긴 나라는 쇠퇴하였다. 남한산성은 이처럼 중요한 위
1. 서론
성남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모든 표지판의 중심에 ‘남한산성 도립공원’ 이란 이정표가 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남한산성의 남문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에는 많은 등산객과 가족 나들이객들의 휴양지로서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이곳은 우리가 도착했을 때, 평
却說太監喜寧, 自叛降?先後, 嘗導他入邊寇掠, 且阻上皇南還。
각설태감희녕 자반항먀선후 상도타입변구략 차조상황남환
각설하고 태감 희녕은 에센에 반란해 항복한 후로 일찍이 그를 인도해 변경에 들어와 노략질 하게 하고 상황의 남쪽 소환을 저지시켰다.
上皇恨寧切骨, 輒與侍臣袁彬密議, 謀殺
學士陳循, 草詔諭群臣, 日中再正式卽位, 歷史上復稱英宗, 小子也自然沿稱英宗。
일면여대학사진순 초조유군신 일중재정식즉위 역사상복칭영종 소자야자연연칭영종
한편으로 대학사 진순에게 초고 조서로 여러 신하에게 유지를 내려 정오에 정식으로 즉위하니 역사상 다시 영종으로 불리니 나도 자
양사기가 말했다. “태종황제께는 3자식이 있어 지금 위로 유독 2숙부만 있어 죄를 사면할 수 없고 법은 응당 엄밀히 징계해야 하나 용서할만한 점이 있어 다시 임시로 용서한다. 만약 일률적으로 없애면 조상께서 신령함이 있는데 매우 애통하지 않겠는가?”
榮?聲道:“此系國家大事, 豈?一人所得沮?
却說司禮監王振, 因太皇太后旣崩, 遂得肆行無忌。
각설사례감왕진 인태황태후기붕 수득사행무기
각설하고 사례감 왕진은 태황태후가 이미 붕어해 곧 마음대로 해서 거리낌이 없었다.
先是太祖置鐵牌於宮門, 高約三尺, 上鑄“內官不得干預朝政”八字, 振竟將鐵牌?去。
선시태조치철패어궁문 고약
學士承旨徐臺符以下二十餘人, 入殿親試。
범질 왕부등 제성칭선 내조한림학사승지서대부이하이십여인 입전친시
범질과 왕부등이 일제히 좋다고 말하며 한림학사 승지 서대부 이하 20여명을 조서로 대전에 들어와 친히 시험을 보게 했다.
每人各撰二文, 一是“爲君難, 爲臣不易論”;一是“平邊策
바꾸고 백관의 기거를 모두 예전 제도 그대로 했다.
趙延壽薦引李崧, 說他才可大用。
조연수천인이숭 설타재가대용
조연수는 이숭을 추천하고 그의 재능이 크게 임용할만하다고 설명했다.
還有遼學士張礪, 從前也做過晉臣, 與延壽同時降遼, 亦謂崧可入相, 遼主因授崧爲太子太師, 充樞密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