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渾) · 송익필(宋翼弼) 같은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 이어 좌랑 · 현감 · 전적 · 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이
成渾)의 논쟁을 거쳐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리학자에 의해 한국성리학 이론논쟁의 중요 쟁점이 되어 왔다. 사단과 칠정을 구분해서 보는 견해는 이미 조선 초기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에 나타난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기론적 해
成渾)의 논쟁을 거쳐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리학자에 의해 한국성리학 이론논쟁의 중요 쟁점이 되어 왔다. 사단과 칠정을 구분해서 보는 견해는 이미 조선 초기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에 나타난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기론적 해
成渾) 사이에서 다시 논의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사단이 이(理)에 속하는가 아니면 기(氣)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와, 이(理)가 과연 발동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두가지 문제였다. 16세기 말에 발생하였던 이 논쟁은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
成渾파를 중심으로 한 畿湖지방으로 東人은 宣祖 중반에 南人과 北人으로, 西人은 肅宗 초반에 老論과 小論으로 나뉘었다.
. 氣에 대한 理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氣의 영향을 받지 않는 理로 理의 우위론을 내세운 영남의 退溪學派(李滉과 이황을 추종하는 학파의 총칭)와 氣의 영향력을 주목하여 理를
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
成渾) 등과도 교유하였다. 1561년 진사시에, 다음 해 별시문과에 각각 장원,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1566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8년(선조 11)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곧 이어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珍島)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
成渾)이 중심이 되었으며, 동인은 주로 이황(李滉) ·조식(曺植)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구성되었다. 이 중 구성이 복잡한 동인은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남인과 그 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분기되며, 북인은 다시 대북 ·소북 등 여러 분파를 낳았다. 각 붕당간의 부침이 심한 선조 때를
成渾) 사이에서 다시 논의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사단이 이(理)에 속하는가 아니면 기(氣)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와, 이(理)가 과연 발동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두가지 문제였다. 16세기 말에 발생하였던 이 논쟁은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