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人畵)의 개조(開
祖)로 여겨지고 있다. 송(宋, 960∼1279) 때의 소식(蘇軾, 1036~1101)은 그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다.
왕유(王維)의 시는 전기와 후기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전기의 시들이 도회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비해
文人畵)의 발흥이라 할 수 있겠다. 원나라는 광대한 판도(版圖)를 영유하여 동·서의 교통은 활발하게 되었으나, 위정자들이 회화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어서인지 화가의 대부분이 송나라를 계승한 한민족(漢民族)의 피를 이었으나, 송나라 때와 같은 화원(畵院) 제도는 설치하지 않았다. 송나라 때의 화
文人畵)에 많이 이용되었다.
아들 미우인(米友仁)에 이르러 성립된 이 일파의 화풍을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한다.
그의 탁월하고 직관적인 감식안은 북송 말의 회화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화사(畵史)》 외에도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서사(書史)》 《보진영광집(寶晋英光
오파 [吳派, Wu school]
오파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에 활약해던 명대(明代)의 회화 유파 중 하나이다.
명대에는 크게 궁정회화, 직업화가를 주도한 절파(浙派), 문인화가를 주도한 오파(吳派)를 중심으로 화풍이 형성되었다. 오파는 문인화가들로서 자신들의 문인화(文人畵)를 통해 각자의 표현양식
문인화론의 효시
- 소식, 이공린, 소동파
북송(北宋) 문인화(文人畵)
중국의 역사적 전통에서 시와 그림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그림 속에 시정(詩情)이 들어 있거나 그림 속에 의경(意境)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송대의 화가들 중에는 그림을 그리고 난 뒤 우아한 시를 써넣는다거나 제재로서 시를 빌
文人畵)들은 예술적으로 뒤지지 않는 훌륭한 작품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인화란 무엇인가.
문인화란 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문인이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린 그림을 말한다.
문인화는 종종 남종화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문인 화가뿐 아니라 직업 화가도 남종
文人畵)화법을 창안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역사서 이외에도 시·정부문서·편지, 기타 소품들을 합쳐 150권이 넘는다. 그의 서재는 1만 권이 넘는 책과 고대로부터의 문학적 유품 및 고고학적 기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李知玹 옮김 (출
선비의 회화
1. 문인화
(1) 문인화란
문인화(文人畵)는 동아시아 문화의 전통을 이어온 그림이며 동아시아 회화 이론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이면서 철학적이고 지적인 미술로 인정받았다. 문인은 ‘학문과 덕행이 어우러진 뛰어난 인물’이란 의미로, 문인화는 의미 그대로 사대부계층의 문인들이 여가
文人畵)라 지칭하여 직업화가의 그림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오대의 무인난세를 통일한 송대 태조와 태종대에 걸쳐서 중앙집권적 문신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인세력을 제거하고 독서인을 재상으로 기용하는등 숭문주위정책을 펴 사대부들은 관계에 진출할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특히 과거제
文人畵)에서나 사대부의 거실, 그 어디에서도 색채가 거의 없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을 지배했던 유교적 사고방식이란 인간적인 감각이나 감정은 멀리하고 인격과 형식, 규범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상이었기 때문에 색(色)이 있는 것은(有彩色) 곧 육욕(肉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