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夷論的) 세계체제를 유지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왕 고종(高宗)과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에 걸림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척사위정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 중에서 반외세 자주 운동으로서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나, 반봉건 근대화 운동으로서는 부정적 측면을 가진 민
華夷論)의 분석이 한 칼에 두 쪽을 낸 듯 분명하다고 호평하였다. 그런가 하면, 주기론(主氣論)의 학맥을 자처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경우에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기정진이 죽고난 후에 그의 문인들과 간재와 그 문인 사이에 치열한 논전(論戰)이 전개되었음은 물론이다.
논란의 장(場)을 제공한 학
‘중화민국’이라는 국명 아래 중국 국민들의 단결 및 통합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표 도안에 국명을 표기
근대이전 단순히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용어
19C이후 민족, 영토적으로 타국과 정확한 경계를 지닌 국가개념으로서의 용어
20C초 신해혁명의 결과 국명으로 ‘중화민국’이 채택
華夷論)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화이론이 우리 문학에 끼친 영향은 서사문학의 발달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과 주변국과의 관계의 변화는 서사문학에서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그리는데 소설이 가장 알맞은 장르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상술하면, 고대의 신화는 자아(自我)와 세계(世界)가
華夷論)에 근거한 사고방식은 조선후기에 들어서 '화'의 척도로 평가되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함에 따라 '이'에 지나지 않는 청나라를 배격하고 '화'를 지켜야 한다는 북벌(北伐)의 논리를 내세운 지배층과, 청나라를 '화'로 인정하고 배움의 대상으로 삼자는 북학(北學) 노선을 주장하며 민족
華夷論)에 근거를 두었다. 원래는 화이론이 한문을 공동문어로 삼고 유학을 보편적 이념으로 삼으면서 거기 포함되는 문명권을 화(華)라고 하는 중세보편주의의 표현으로서 그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의가 있었으나, 중세 보편주의가 사회 변화를 막는 보수적인 작용을 적극적으로 하자 불신의 대상이
1. 요약
1) 20세기 현실에서 《노자》와 《장자》는 주로 철학서로 다루어진다. 그것은 19~20세기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이뤄진 결과이며, 따라서 과거의 전통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 pp.119
2) 《노자》, 《장자》는 무엇보다 장구한 동아시아의 철학, 도교의 원류이자 도가의 종주 가운데 하나
Ⅰ. 서론
조선후기는 여러 방면에서 혼란이 야기된 시대였다. 대내적으로는 지배계층의 동요로 관료의 기강이 문란해졌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는 날로 심해져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유랑민이 되어 떠돌거나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쳐 농촌사회는 점점 더 황
대원군 정권과 서구 열강의 침입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고종이 즉위했다. 대왕대비 조씨(익종의 妃)가 수렴청정의 권한을 갖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대원군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하였다. “嗣王이 年幼하고 국사가 多難하니 대원군이 大政을 協贊하고,… 百官有司
문학이 성장하면서 문학을 하는 자세와 방법에 대한 검토를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추세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평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났으면,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을 그 첫 예로 들 수 있다.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이다.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않고서 생각나는 대로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