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2002년부터 200억 위안(약 3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추진 중인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현재의 중국 국경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사로 만들어 현재 중국의 영토와 지위를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지난 20년 동안 1000편이 넘는 고구려·발해 관련
계루부(桂婁部)가 대두하여 고구려사회를 이끌었다. 이후 계루부는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고구려 국왕의 지위를 독접하였다.
2세기 초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압록강유역의 여러 '나'들은 계루부(계루부)·소노부(소노부)·절노부(절노부(절노부)·순노부(순노부)·관노부(관노부) 등 다섯 집단을
계루부: 왕실 형성 소노부: 전 왕족 절노부: 왕실과 혼인 순노부, 관노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왕실은 교체가 없이 단일 왕조로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름 또는 별칭에 해(解)를 사용하여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분명하게 주몽과 5대 태조왕 이후를 고(高)씨 성의 왕으로 2대 유
계루부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는 고구려의 건국설화에 주몽이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압록강 유역의 토착세력인 송양왕 집단을 누르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즉 부여계 유목민인 주몽으로 대표되는 세력집단이 바로 계루부로서, 이들 주몽
계루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의5부족 연맹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가 왕위를 대신하였다.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등장하였고 전 왕족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에게는 고추가라는 특별 칭호를 주
계루부 고씨가 이후로 쭉 이어지게 된다. 일설에는 태조왕 이후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魏]오랑캐는 여러 나라의 사신 관저를 두었는데, 齊나라 사신의 관저를 제일 큰 규모로 하
고구려
(1) 정치체계
고구려는 본디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어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부족연맹의 장(長)인 왕이 나왔으나 후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이 5부족은 항상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되었는데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부족제도가 무
계루부 고씨가 단독으로 왕을 이어가게 되었다. 단독으로 왕을 이어간다는 것은 왕권이 강화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는 등 영토를 넓혔으며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하여 실질적인 국가의 면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고국천왕(179~197)
왕위의 형제 상속제를 부자 상속제
계루부가 고구려 연맹 안에서 송양왕이 다스리던 송양국을 제치고 고구려 연맹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계루부가 고구려의 으뜸이 되는 부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훗날의 일이기에 건국사와는 큰 상관이 없겠으나, 고구려 초기의 중심 세력이었던 송양의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