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를 관동의 좋은 경치 가운데 국도가 가장 빼어난 곳이라 하여 놀며 즐기는 자들로 하여금 배를 준비하고 술과 밥, 기생과 음악을 싣고 가나 농민을 훼방하고 백성을 해롭히니 일방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겼다. 이에 장구 육운시(六韻詩) 일편을 이루어서 뒤에 오는 자의 경계를 삼고자 한다.
관동별곡과 속미인곡 두 작품을 자세하게 살피도록 하겠다.
Ⅱ. 송강의 문학과 사상
1. 송강의 삶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본관은 연일, 자는 계함, 송강은 호다. 돈영부 판관 유침의 아들로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 유의 부인인 둘째누
Ⅰ. 들어가며
<관동별곡>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원주에 부임하면서 관동팔경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유람하고 지은 작품으로 빼어난 문장의 사용으로 가사 문학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선인들의 생활, 사상, 감정, 이상 등이 담긴 문학성이 높은 작품으로 교육적 가치를
ⅱ. 사회적 배경
<관동별곡>은 선조 13년 1580년에 쓰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므로 전쟁 직전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은 흔히 우리가 들었던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왜국에 보내 동향을 살피도록 했으나 이듬해 돌아
이항복, “송강이 반쯤 취해 즐겁게 손뼉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눌 때 바라보면 마치 하늘나라 사람인 듯 하지.”
이이,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
<관동별곡> 본문 중 ‘취선’, ‘신선주’
정철 본인이 좋아했던 술과 풍류에 취해
옛 신선들과 자신을 동일시
창작배경>
- 1330년 안축(安軸 1287 ~ 1348)이 지은 경기체가
- <근재집> 권2에 전함
- 작자가 44세 때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및 명산물에 감흥하여 짓게 됨
- 관동별곡과 관동와주에 실린 한시들 간의 괴리가 생김
: 당시대의 현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
Ⅰ. 표현과 창의적 언어표현
문자언어, 음성언어, 신체언어 등 다양한 말놀이 자료를 투입하여 자신의 언어를 자기만의 색깔로 표현할 수 있는 질 높은 언어생활을 위해 창의적 언어표현력 신장을 위한 새로운 교실수업 개선의 노력이 요구된다.
1. 말하기 태도
자유롭고 허용적인 분위기를 조성
관동별곡」에서는 역시 산천 조국을 아름답게 그리고 우리말로 작품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정철의 신분적 계층으로 인하여 봉건적 사상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단점을 보이고 있다. 이는 남한과 비교할 때 '연군지정의 사상과 같다고 할 수 있으나, 한계성까지로는 비약시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