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정치철학 심층연구
관자 (管子)
제 1절 관자(管子)의 생애와 시대
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영상 출신으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자는 중(仲)이다. 그의 생존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장왕(莊王) 12년에 제나라 환공(桓公)의 재상으로 40여 년 정도 활약하다가 기원전 645년
서론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에 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이다”라고 했다. ‘목민’이란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관자(管子) 제1편 「목민」에 서 유래했다. 목민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목민(牧 民)에서 목(牧)은
관자(管子)』라는 책이다.『管子』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보다 이른 시기에 편찬된 중국문헌에서는 조선에 대한 내용이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료(史料)에는 단지 조선이 하나의 지명(地名)으로만 기록되었고, 그 위치나 명칭의 기원에 관해서는 나타난
관자(管子)]에 보면, 군주는 백성을 위해 경제적인 부강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농정책을 실시해야 하고, 또 검약한 생활과 물품의 원활한 수송으로 궁핍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공업과 상업은
관자(管子)》 <법금(法禁)>에는 <붕당을 만드는 것을 벗을 사귄다 하고, 악(惡)을 가리는 것을 인(仁)을 실천한다>고 하여 당파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순자(荀子)》 <신도(臣道)>에서는 <붕당을 만들어 끼리끼리 친하며 임금을 둘러싸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도모하기를 일삼는다>고 하여 붕당의 부정적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관자(管子)』「심술상(心術上)에 따르면 도와 덕의 관계가 잘 나타나있다. “덕은 도의 거 처이다. 만물은 도로부터 덕을 얻어 생성되고, 생물은 덕을 얻어 도의 정기를 인식한다. 따 라서 덕이란 얻는다(得)는 뜻으로, 만물은 저마다 얻은 바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무위(無爲)를 일컬어
관자(管子)」와 1973년 장사 마왕퇴 한묘에서 발굴된 「황노백서(黃老帛書)」(일명 黃帝四經)가 유명하다. “관직을 맡지는 않되 국사를 논한다”(不任職而論國事: 「염철론․論儒」)는 “不治而議論”(「사기․田完世家」)의 학궁 운영방침은 관과 학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
, 또 검약한 생활과 물품의 원활한 수송으로 궁핍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으며, 공업과 상업은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국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管子』, 「法禁 第十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