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는 한국사회에 너무나 큰 형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6&25전쟁이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모든 문제를 잉태하고 있듯이, 4&19가 이후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사건이 되었듯이, 광주는 1980년 이후 한국사회를 끌어온 중요한 사건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이다. 광주시민항쟁 이후 남한의 정
2) 광주시민의 시민의식 발휘
위의 내용을 볼 때 19, 20, 21일까지 광주시민들이 봉기하여 계엄군에 항거함으로써 신군부의 작전은 차질을 빚었고, 22일부터 27일까지는 계엄군이 시민군에 의하여 퇴각한 일종의 자치구와 같은 이른바 금남로 해방구를 형성한다.
이 기간 동안 시민군에 의해 자치
광주는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이 시의 북서부를 관류하여 서남으로 흐르며 동쪽에는 무등산, 북쪽에는 병풍산, 삼각산, 남쪽에는 금당산, 서쪽에는 어등산, 용전산이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광주는 터진 일종의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대촌천, 오례천, 지석천 등 영산강의 지류들이 있어
②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광주민중항쟁은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가, 5월광주항쟁이 우리 역사에 제기한 과제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는 광주민중의 5월투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은 자명할 것 같으면서도 막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1980년 5월에 광주의 80만 시민은 수백 명을
1. 서론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가슴아픈 상처가 있다면 바로 5 18 광주 민중항쟁일 것이다. 과거 위정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광주사태」라 불리울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은 5 18 광주 민중항쟁은 사건의 핵심 책임자인 전직 두 대통령이 재판에 회부되었음에도
광주인가?
광주민중항쟁은 5·17조처에도 아랑곳없이 민주화를 위한 외침을 수그러뜨리지 않았던 광주지역의 대학생들과 시위 초기부터 나타난 진압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사태가 험악하게 진행되어 되레 시민들의 참여를 촉발케 한 측면이 크다.
①광주는 박정희시절부터 산업개발에서 소외되어
광주를 기억해낼 것이다.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은 민주항쟁이라는 단어도 생각해낼 것이고, 수많은 피와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라도라는 단어를 연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연상한 수많은 사람들은 지역감정이라는 단어도 끄집어낼 것이다. “전라도 새끼들 다 죽여
I.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중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12·12 하극상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정권찬탈음모는 결국 80년 5월, 광주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민중항쟁은 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
광주 민주화운동은 시작된 것이다.
④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시내전화 통화 재개 ②시외전화 두절
→ 광주외부지역으로 통하는 모든 연락을 차단함으로서 광주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른 지역의 국민들은 알지 못하게하였다. 그리고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