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7년(1501)에서 선조 5년(1572)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에 4대 사화 가운데 3대 사화가 잇달아 일어난 사화의 결정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조식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과 참변을 당하는 것을 몸소 목격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남명은 학문과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적극적인 의
조선과 같은 전제군주국가에서는 국왕의 능력 내지 성향이 정치의 동향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의정부와 삼사를 통해 국왕을 견제하는 장치가 잘되어 있어 국왕의 의지가 그대로 정책에 반영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조선사 전체를 통틀어 보면 성군과 폭군 또는 유능한 군주와 무능한 군주가
기축옥사에서 남명 문인 등이 대응 했던 모습과 임진왜란시의 의병활동, 광해군대에 남명의 학통을 강화하는 모습을 통해 이 시기 남명 문인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포착하고 이러한 활동들이 갖는 시대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박학풍과 실천의 중시
남명의 문인들에게서 우선적으로 나타
기축옥사로 희생된 최영경과 정개청의 사적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은 허목의 사상에 조식과 서경덕 학파의 입장이 깊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 내부에서 북인과 남인으로 분립이 이루어 졌고, 서경덕과 조식의 문인들은 정치적 피화자라는 공동의식을 가졌
기축옥사 때문에 두 갈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때는 송강의 나이 54세, 1589(선조22년) 기축년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을 시발점으로 선조 임금은 특명으로 송강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한다. 선조 시기의 동인들이 득세했던 것과 관련해 동인의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했다는 것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기축옥사(己丑獄死) 때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의 시체를 거두어주었다는 죄로 함경도에 유배를 갔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이어 호조좌랑, 안약현감, 영월군수,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7년 평양에 가 현지를 답사하고 [기전유제설(箕田遺制設)] 과 [기전도(箕田圖)]를 저술하였다.
기축옥사로 사라지면서 서인이 주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인들은 다시 노론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경종대와 영조대에 소론과 대립하면서 조정을 주도하였던 노론에 경상(京商)이라 할 시전상인이 합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위해 기득권 세력인 노론과 결탁한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단식하다 목을 매달아 자결하려 했다가 이계(1603~1642)의 밀고로 심양에 끌려가 8년간 고초를 겪었던 척화론의 종주 김상헌(1570~1652)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내세워지고 이를 따르는 김집.송시열 등이 대거 등용되어 송시열(1607~1689)이 북벌론을 천명하는 ‘기축봉사’라는 비밀 상소까지 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