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농기구 발달에 따른 농업기술의 발전
민성기는 쟁기의 연구에서 쟁기의 변천을 고찰하여 조선초기에 볏이 없는 ‘보’쟁기에서 조선후기 볏이있는 ‘장기’로 전환하여 이것이 토지비옥도의 증대를 가져와 2년 4작 2년 4작이라는 전지이용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장기
병작제는 지주 적 토지 소유의 경제적인 경영방법의 하나로 병작제 발생의 역사적 전제는 토지 소유가 불균등하게 되고 부세 부담이 가중되는 때이다. 우리나라에서 병작제가 형성된 시기는 병작제의 주체인 지주와 병작제의 경력으로 볼 때 고려 초, 중엽이라고 할 수 있고 일제 식민지시대 이전까지
1. 들어가며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사관의 논점에 따른 한국 사회의 정체성론은 이미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하지만 근대라는 시대에 있어서 서구의 발전 도식을 그대로 한국사에 이식한 논리도 비판이 따랐다. 각 사회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른바 “근대”라는 것도 정답이 없다. 큰 기
병작으로 대여하여 지대를 수취하는 경영형태를 말한다. 농업생산을 자작과 병작으로서 하되, 병작으로 대여하는 농지보다는 자작으로서 경작하는 농지가 더 많은, 말하자면 농업생산을 자작대농으로서 경영하면서 그 농지의 일부를 경영관계상 병작으로도 대여하고 있는 자작 겸 지주인 농가가 이에
병작반수제에 입각한 지주제를 확산시킴
② 후기 : 직전법 폐지 이후 토지 소유의 양반 편중, 지주전호제 강화
*유형원의 균전론- 자영농 육성 (사?농?공?상에 따라 차등 분배)
*이익의 한전론- 영업전 설정, 토지 소유 평등화
*정약용의 여전제- 공동농장제도: 토지 공동소유와 공동경작
정전제-
분해현상을 유발하였다. 그것은 토지소유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16세기부터 병작제가 지배적인 관계로 되면서 17세기 이후 지주와 전호간의 관계도 변화하게 되었다. 즉 지주-전호관계가 경제외적 강제가 약화되면서 경제적 관계로 맺어지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3)도시사회과 농촌사회 비교
지 역
병작경영은 대체로 미미하였으므로, 부역노동에 기초한 직영지경영의 비중이 그만큼 컸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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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생산관리
기업의 존재여부를 결정지어주는 것은 결국 고객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위해 제품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지
병작으로부터 소작인이 4할을 차지하고 지주가 6할을 차지하는 4ㆍ6제로 하였다가 3ㆍ7제로 올랐으며 나중에는 2ㆍ8제까지 하였다. 고리대는 매달 이식이 60%이상 올라붙었다. 국내에서 일제의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민족은 만주농업이 흥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주로 이주를 하지만, 위에서 살
병작반수(竝作半收)라고 하는 전호경영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광범하게 존속하고 있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저자립성으로 인하여 유망하기 일쑤인 농민층을 공동체적으로 결속하여 향촌사회에 안착시키는 일은 곧 지주사족의 지배기반의 확보 그것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지주사족층이 중앙
병작반수제라 하고, 지주와 전호농민 사이의 이와 같은 관계를 지주전호제라 한다. 조선정부는 현실적으로 지주 전호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지주가 전호의 경작지를 빼앗음을 금지하여 전호의 경작권을 보호하였다. 동시에 전호에게도 경작지를 매매하지 못하도록 하여 전호를 토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