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비〉이고 여기에는 사실 위주의 건국시조, 구체적인 왕의 행적 등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기술되어 있다. 신라는 〈순수비〉가 가장 대표적인 예로 모든 문장이 제대로 된 한문이고 이두는 고유명사 표기에서만 사용했다. 백제는 국가의 위업을 자랑하는 비문을 남기지 않았고 현존하는 것은 〈
왕릉비는 높이는 6.39m이며, 무게로 따진다면 약 37t이나 된다. 능비의 모양을 보면 불규칙한 長方形기둥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허리 부분은 약간 좁은 편이다. 그리고 이 비의 4면에 당시 유행하던 연서체로 1,775자 ( 동남 1면 11행 449자, 서남향 2면 10행 387자, 서북향 3면 14행 57
삼국시대
(백제)
1. 익산 미륵사지 (益山 彌勒寺址)
사적 제150호.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소재. 백제 무왕 때 세워진 사찰.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고대, 중세 근대의 삼분법은 넷 이상의 시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대와 중세 사이의 시대는 ‘고대만기’라고 하고, 중세와 근대 사이의 시대는 ‘전기근대’라고 하는 말은 유럽에서 흔히 사용한다. 유럽의 ‘전기근대’가 자기네 역사에서는 ‘근세’였다고 일본에서는 말한다. 어디서
통일신라는 백제 · 고구려를 차례로 정벌하여 분열된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나당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 시기 한국 고대 사회에서는 정치 · 사회적 번영 및 대외관계를 통해 무역과 문화적 교류 또한 활발히 진행되었다.
신라의 시대구분은
영락 8년조 기사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愼土谷, 因便抄莫斯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398년 고구려는 소단위 부대를 파견하여 백신토곡을 시찰하고 남녀 3백인을 잡아가지고 왔는데, 이로써 다시금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겠다고 한 내용이다. 여기서 백신의 위치에 관해
수묘가 중요한 이유
<비문>의 왕통보는 현왕의 임무를 마치고 승천한 조상들의 계보상의 위치를, 후손 장수왕이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 <비문>은, 현재에는 명계에 존재할 조상들이 현왕으로 재위하면서 통치한 과거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장수왕은 <비문>을 구성하면서 수묘를 실천하